지금 여기가 맨 앞
이문재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
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
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
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
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는 것이었다. 고작 열흘 정도 동네를 비웠을 뿐인데 그 사이에 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한국에 비해 봄이 더디고 느리게, 천천히 오는 폴란드는 4월 끝무렵이 되어서야 목련꽃이 활짝 핀다. 혹시라도 여행을 다녀오는 사이에 꽃이 만개해서 절정을 놓칠까 봐 걱정이었는데,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꽃나무들이 봉우리만 움튼 채로 그대로 기다려 주었다. 소담하고 탐스럽게 핀 목련 꽃을 보니 절로 마음이 포근해졌다. 우리 집 창문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면 보이는 백목련과, 대문에서 서너 걸음은 나가야 겨우 얼굴을 보여주는 자목련. 이 두 그루의 나무들이 집 앞 골목에 바람이 스쳐 불 때마다 은근하고 달콤한 향기를 전해줘서, 바람이 불 때마다 코끝이 간지러워서 마음도 같이 간지러워졌다. 나무에 꽃이 피었다고 뭐 이렇게 마음이 간질간질거리는지, 충만하고 행복한 감정이 너무 쉽게 다가와서 '봄'이란 참 신기한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이곳의 날씨는 새벽에 서리가 내리고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등 여전히 추웠다고 한다. 게다가 4월의 첫날, 폴란드엔 함박눈이 내렸었다. 만우절 거짓말처럼 온 세상이 새하얗게 변한 '겨울' 왕국을 보면서 과연 봄이 오고 있기는 한 건지, 이 겨울에 끝이 있기는 한 건지 의심하기도 했다. 겨울의 추위는 잊을만하면 다시 찾아오기 일수였고, 작년 10월부터 지겹도록 입었던 겨울 옷은 가장 손이 잘 닿는 옷장 1등석에 그대로 걸려 있어야만 했다. 참 지겨웠던 그 겨울이 "이제는 정말 끝. 나 그만 갈게. 반년(?) 뒤에 봐~"하며 손 흔들며 사라졌다.
드디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된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이 나면 새로운 시작이 있다. 계절, 생명, 자연, 우주, 모든 순환하는 것들을 마주할 때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자연의 이치인데도 매번 놀라고 새삼 경탄한다. 어찌 보면 끝과 시작은 늘 같이 붙어있는 셈이다.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아쉬워하는 마음이 무색하게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이, 첫 페이지가 다시 열린다.
"지금 여기가 맨 앞. 매일매일 남은 인생의 첫 페이지를 펼치고 있으니 새해 빳빳한 새 다이어리를 펼치는 그 느낌으로 매일 하루를 시작하면 정말 설렐 것 같아요."
이문재 시인의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남겼던 단상의 일부다. 여전히 나는 남은 인생의 첫 페이지를 열심히 기록하고 있긴 한데, 요즘 들어 내 노트 말고 남의 노트가 더 궁금해지는 마음이 생겼다. 바로 인생의 '봄'을 향해 나아가는 큰 아이의 다이어리다. 꽃처럼 뭉근하고 예쁘게, 요즘 한창 피어오르는 아이. 정말 '시작점'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란 저런 거구나, 하며 감탄 어린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중이다. 봄을 맞이하는 사람의 모습은 저렇게 예쁘구나. 보기만 해도 설레는구나. 봄이란 참 신기한 계절이구나.
지난 열흘 간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내내 같은 방을 쓰다 보니 아이가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곁에 있게 되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흠칫흠칫 놀라고 말았다. 나랑 옷 사이즈가 비슷해진 것은 물론이고, 몸에 굴곡이 생겼기 때문이다. 둘째도 신기한 듯 언니를 쳐다보며 묻는다. "언니, 언제 이렇게 가슴이 커졌어?" 이제는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변모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이상하다. 그동안 봉우리의 모습처럼 귀엽고 동그랗게 아기처럼 내 옆에 머물던 아이가 갑자기 커다란 꽃송이로 피어나는 느낌이다. 나도 저 나이 때 저랬을까. 이제는 기억에서 아득해져 버린 유년 시절 중 한 페이지를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 되돌아가 채우는 느낌이다.
내가 가진 노트의 남은 페이지를 기록하는 일도 설레지만 아이의 페이지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채워질지 상상하는 일도 더불어 나를 즐겁게 한다. 아이가 새로 기록하는 페이지를 볼 때마다 나는 어떤 마음이 들까. 오늘 봄을 맞이한 그 느낌처럼 행복이 성큼 다가와서 감탄을 전해주겠지. 엄마로 살아가는 나날들이 아무것도 없는 끝처럼 느껴져서 답답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육아의 시간이 시작점보다는 끝점에 더 가까이 다가왔다는 걸 느낀다. 잘 돌보는 것보다 잘 독립시키는 것에 대해 더 열심히 고민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나 처음 엄마가 되었을 때 느꼈던 불안감보다는 그때와는 다른 여유로운 마음이 슬며시 싹튼다. 즐길 줄 아는 마음을 갖게 된 걸 보니, 엄마 졸업과 함께 또 다른 시작이 다가오는 건가. 그러고 보니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