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시투구꽃을 생각함
- 문성해
시 한 줄 쓰려고
저녁을 일찍 먹고 설거지를 하고
설치는 아이들을 닦달하여 잠자리로 보내고
시 한 줄 쓰려고
아파트 베란다에 붙어 우는 늦여름 매미와
찌르레기 소리를 멀리 쫓아내 버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먼 남녘의 고향집 전화도 대충 끊고
그 곳 일가붙이의 참담한 소식도 떨궈 내고
시 한 줄 쓰려고
바닥을 치는 통장 잔고와
세금독촉장들도 머리에서 짐짓 물리치고
시 한 줄 쓰려고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난 각시투구꽃의 모양이
새초롬하고 정갈한 각시 같다는 것과
맹독성인 이 꽃을 진통제로 사용했다는 보고서를 떠올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난데없이 우리 집 창으로 뛰쳐 들어온 섬서구 메뚜기 한 마리가
어쩌면 시가 될 순 없을까 구차한 생각을 하다가
그 틈을 타고 쳐들어온
윗집의 뽕짝 노래를 저주하다가
또 뛰쳐 올라간 나를 그 집 노부부가 있는 대로 저주할 것이란 생각을 하다가
어느 먼 산 중턱에서 홀로 흔들리고 있을
각시투구꽃의 밤을 생각한다
그 수많은 곡절과 무서움과 고요함을 차곡차곡 재우고 또 재워
기어코 한 방울의 맹독을 완성하고 있을
브런치 속 세상은 신기하다. 이 브런치라는 이름의 플랫폼, 가상의 공간에 사는 많은 언니들은 기어코 글 한 편 쓰겠다고 억척스럽게 자신의 삶을 쥐어짠다. 엄마, 아내, 딸, 며느리, 그리고 김대리, 이 팀장, 정선생님 등등... 그녀들은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름으로만 살기는 싫어서 키보드 앞에 앉는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수많은 우여곡절을 한 방울의 정수로 차곡차곡 재우고 또 재워 한 편의 글을 완성한다.
그 한 방울의 문장에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시간이 숨어 있다. 문장 속에서 문자화 된 구체적인 실체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그녀들의 삶을 그려내기 위해 보이지 않는 수많은 시간들과 사건들을 참고 인내하고 가슴에 품어서 녹여낸다. 어쩌면 내가 쓰는 지금 이 글이 그렇고, 문성해 시인의 시가 그렇다.
어제, 글 한 편 쓰겠다고 산더미같이 쌓인 빨래도 외면하고 싱크대에 쌓인 설거지도 무시하고 모니터 앞에 앉았다. 어제, 글 한 편 쓰겠다고 마당에 수북이 쌓인 낙엽도 외면하고 거실에 굴러다니는 자잘한 레고 조각도 무시했다. 그러나 글 한 편 쓰겠다고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은 내가 하필이면 브런치 작가의 서랍을 바로 열지 않고 이메일함을 먼저 열어버리는 바람에 그 틈을 타고 새로운 일거리가 일상에 흘러 들어왔다. 둘째 아이 담임 선생님의 이메일이었다.
올해 한국 나이로 여덟 살인 아이가 학교 수업 시간에 심하게 울었던 일, 그렇지만 교과 선생님도 담임 선생님도 아이가 왜 그렇게 울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는 글, 때때로 예민하고 감정적인 아이를 다루는 게 버거워 선생님들이 내 아이를 두고 서로 이야기를 나눴던 일,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부모의 의견을 묻는... 여러 가지 이슈들이 뒤죽박죽 섞여있는 그 이메일을 받고 나니 머릿속은 하얘졌다. 아이 문제가 내 머릿속을 한 번 점령한 이상, 다시 글을 쓰기 위한 정돈된 마음가짐으로 돌아가는 건 영영 불가해졌다. 내가 애초에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았던 이유가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담임 선생님에게 영어로 된 장문의 이메일을 쓰고, 같은 이슈로 교과 선생님에게 또 다른 장문의 이메일을 받고, 아이의 마음이 혹시 다칠까 봐 조심스럽게 학교에서 불거졌던 여러 이슈에 대해서 물어보고, 아이와 모국어로 나눴던 그 대화를 다시 영어로 번역해 선생님에게 보내고... 영어와 한국어를 오가며, 평소에 잘 쓰지 않던 굳어있는 머리를 굴려가며 그리고 가끔씩 주저앉는 마음을 토닥여가며 이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고 나니 만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내 마음은 한 방울의 문장도 짜내지 못할 정도로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그러나 그 조각난 마음을 붙잡고 오늘 다시 컴퓨터 앞에 앉고 보니... 아, 하루의 시간을 두고 다시 생각해보니 어제의 일은 산 중턱에 홀로 피어있는 꽃을 이리저리 흔드는 바람보다도 더 사소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아이가 크게 문제 행동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그저 수업시간에 좀 눈물을 흘렸던 것뿐이다. 오히려 그것을 걱정하고 보듬는 선생님들이 있어서, 아이의 상처받은 마음을 그저 작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찬찬히 들여다보려고 애쓰지 않았던가. 아이의 곁에 그런 어른들이 있다는 것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 감사할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어제의 일은 또다시 나의 글감이 되었다. 시 한 줄 쓰려고 이런저런 일상의 사소한 일들을 그러모아 기어코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시인의 마음처럼 나도 이 작고 소소한 일상들을 잘 기록해서 나의 이야기를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맹독성이기도 하지만 진통제이기도 한 각시투구꽃처럼, 나를 아프게 했던 사건은 오히려 나의 위로가 되었다. 글을 쓰겠다고 자리에 앉기 전까지는 생각이 이렇게 흘러가지 못했는데,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의식의 흐름은 어떻게 그 방향을 바꿨을까.
브런치라는 공간에 머무는 우리는 내가 지나온 모든 시간들. 이 모든 시간들을 차곡차곡 재우고 또 재워 글이란 형태로 세상에 내놓는 작업을 한다. 내가 엄마로만 살기 싫어서, 더 본질적인 나의 삶에 가까워지고 싶어서 수많은 생각과 아픔을 견뎌내며 한 방울의 치명적인 맹독을 만들어가는 과정. 그러나 결국에 만들어낸 그 한 방울의 문장은 그 누구도 아닌 내게 진통제가 될 것을 안다. 기어코 한 편의 글을 쓰겠다고 애쓰는 지금 이 순간. 어찌 보면 작고 보잘것없는 나의 일상. 그 일상을 담아 한 방울의 문장을 만든다.
이런 일상을 담은 오늘의 기록은, 더 이상 선생님께 이런 세세한 이메일을 쓸 일이 없어지는 멀지 않은 미래가 오면 내게 진통제와 같은 소중한 각시투구꽃이 되지 않을까. 자잘한 일들이 넘치는 하루도, 그런 마음들을 담아둔 이 기록도 오로지 지금에만 담아낼 수 있는 한 방울이니까. 자꾸만 나의 마음은 엄마의 역할과 육아의 부담에서 자유로워지는 저 너머의 먼 미래를 꿈꾸지만, 사실 가장 소중한 세월은 매일매일 반복되는 설거지와 함께 흘려보내는 이 일상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잊지 말아야 한다. 글 한 편 써보겠다고 앉았을 때 생겨나는 이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