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저 바라보기로 해요

by 주정현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 유병록


우리

이번 봄에는 비장해지지 않기로 해요

처음도 아니잖아요


아무 다짐도 하지 말아요

서랍을 열면

거기 얼마나 많은 다짐이 들어 있겠어요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해요

앞날에 대해 침묵해요

작은 약속도 하지 말아요


겨울이 와도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돌아보지 않기로 해요

봄을 반성하지 않기로 해요


봄이에요

내가 그저 당신을 바라보는 봄

금방 흘러가고 말 봄


당신이 그저 나를 바라보는 봄

짧디 짧은 봄


우리 그저 바라보기로 해요


그뿐이라면

이번 봄이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올 초에도 새해를 맞아 다 쓰지도 않을 다이어리를 구입했다. 1월에는 그래도 꽤 빼곡하게 일상의 기록을 남겼는데, 2월이 지나고 3월이 되자 다이어리에 빈 공백이 늘어났다. 매년 무수히 반복되는 일이다. 1월에는 돈 쓴 거, 공부한 거, 먹는 거, 운동한 거 시시콜콜하게 다 적었는데 어느새 기록이 뚝 끊겼다. 3월의 다이어리에는 빈 공백이 많다. 그 공백을 바라보는 마음이 씁쓸하다.


올해 새해에도 무슨 결심을 그리도 많이 했던지. 매일 운동도 하고, 글도 쓰고, 책도 읽고, 영어공부도 하고... 온갖 자기 계발에 대한 결심을 했지만 그중 태반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하고 3월의 내가 1월의 나를 보고 비웃는다. 지키지도 못할 목표들을 뭐 그리 빼곡하게 적어놨니. 그러자 1월의 내가 항변한다. 그렇게 끄적이기라도 해야 불안하지 않거든. 그렇게 뭐라도 적어야만 내가 멈춰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거든. 그리고 그렇게 뭐라도 결심했으니 이만큼이라도 한 거거든.


봄의 내가 시인의 말을 빌려 답한다. 올해는 한 번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면 어떨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인걸. 금방 흘러가고 말 봄. 짧디 짧은 봄. 우리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어떨까. 그뿐이라면 이번 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다만 끝없이 중심에 대해 생각해보렴. 그 크고 작은 결심을 하게 만드는 너의 불안감은 어디서 왔니. 진짜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길래 그런 결심을 하게 되니. 그렇게 가만히 너의 마음을 들여다보다가 네가 발을 딛고 있는 이 현실을, 이 계절을 한 번 마주해보렴. 지금을 만끽하고 지금을 느끼며 살아보렴. 특히 너는, 인생에서 봄의 계절을 보내고 있잖아. 아직 어린아이들과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은 너와 아이의 봄이잖아. 이 봄에 아이와 눈을 맞추고, 아이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그리고 가만히 서로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그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문득 뒤돌아 아이를 바라보니 아이의 얼굴 뒤로 비치는 봄햇살이 눈부셨다. 햇빛에 등을 진 아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눈을 찡긋 감았다 떠보니 햇살 속에서 아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아이가 다시 웃었다. 나도 다시 웃었다. 한참을 서로를 그렇게 바라보며 웃음을 주고받는데 아이가 다가와 말한다.


"엄마. 신기하지. 엄마가 웃으면 나도 웃게 된다. 웃음은 전염되나 봐."


그렇게 다시 한번 웃으며 내게 웃음을 전염시킨 아이가 말을 덧붙인다.


"아, 그래. 세상 사람들 모두를 웃게 만드는 방법을 알았어. 내가 웃으면 되는 거야. 그러면 웃음이 옮겨가고, 그 웃음이 또 옮겨가고 그래서 결국엔 모두가 다 웃게 될 거야."


그건 봄의 말이었다. 봄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아이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아이가 건네는 예쁜 말과 그만큼 해사한 미소를 통해 아이와 나의 봄을 느꼈다. 그러자 시인의 말도 함께 마음에 들어왔다. 저 웃음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행복하고 눈부시니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에 충실하고 서로의 마음을 흠뻑 느끼기만 해도 좋겠다. 그 웃음은, 미소는, 햇빛은 다이어리에 기록할 수 없겠지만, 기록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흘러가는 대로 두어도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을 테니까.


운동도, 영어공부도, 독서도 좋지만... 아이와 함께 있는 순간에 집중하며 이 시간을 미루지 말아야겠다. '육아서를 읽을 시간에 육아를 하라는' 명언이 떠올랐다. 읽던 책을 덮고, 밀린 다이어리를 덮고, 시선을 돌려 아이를 바라볼 줄 아는 그런 엄마가 되어야지. 그저 우리가 함께하는 이 봄을,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을 지금 즐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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