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선반에 백단향을 담은 함을 두었는데 거기 꽂혀 있던 책에 향이 배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백단향이 난다.
황정은, <일기 日記> 95쪽
지난가을에 미정님과 함께 성수동을 걷다가, 길거리에서 향수 홍보용으로 나눠주는 시향지를 받았다. 원체 수집욕이 있는 나는 잡다한 물건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는 것을 좋아하는데, 특히 길거리에서 받은 시향지는 꼭 따로 모아두는 편이다. 도톰하고 만듦새가 예쁜 시향지는 책갈피로 쓰기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풍경이나 모던한 느낌의 추상화, 또는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모를 낯선 브랜드의 이름이 인쇄되어 있는 것도 좋아한다.
그날도 길거리에서 시향지를 받아 향기를 한 번 흠, 들이마시고는 그대로 가방에 있던 책 속에 꽂아두었다. 가방 속에 있던 책은 전날 교보문고에서 구입했던 한강 작가님의 <작별하지 않는다>였다. 외출할 때 가방에 늘 책을 한두 권 가지고 다니는 편인데, 이렇게 우연히 받은 시향지는 그날 자신의 짝꿍책을 만나 그대로 쭉 함께하게 된다. 책에 한 번 들어간 책갈피는 좀처럼 다른 책으로 옮겨가는 일이 없고,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책갈피를 꽂은 채 책꽂이에 돌려두는 일이 많기 때문에 시향지에 배어있는 향기는 그대로 그 책의 향기가 되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고유의 냄새를 풍긴다.
이렇듯 시향지를 모으는 이유를 그날 함께 걷던 미정님에게 설명하다가 '후각이 자극하는 독서의 기억'까지 이야기가 확장되었다. 책에 고유의 냄새가 배면, 냄새만으로 책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아시나요? 인간의 뇌에는 후각을 관장하는 부분이 기억과 감정을 관장하는 장소와 직결되어 있어서, 냄새는 기억과 감정을 가장 선명하게 일깨우는 자극이 된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어떤 책에 연합된 향기를 맡으면 그 책을 읽었던 순간의 감정이나, 몇몇 인상적이었던 장면들, 문장들, 그런 것들이 생각나요.
그렇게 책을 읽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미정님은 이 이야기를 한 번 글로 써보라고 했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 겨울이 되고, 나는 그 가을에 읽던 <작별하지 않는다>와 그날의 대화를 잊어버린 채 다른 책으로 끝없이 건너가며 독서를 이어가던 중이었다. 책으로, 책으로 계속 이어가다가,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 12월에 함께 읽을 책으로 <작별하지 않는다>가 선정되었다. 책장에서 오랜만에 책을 꺼냈다. 훅, 하고 복숭아색 시향지의 꽃향기가 책 주변으로 은은하게 퍼졌다. 그리고 후각이 자극했던 나의 기억은...
그날 함께 걸었던 성수동의 공기, 시향지를 받아 들고 향수 가게에서 이런저런 향기들을 탐색하던 저녁. 그날의 대화와 여러 권의 책으로 묵직했던 가방. 그리고 함께했던 미정님의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