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가 지나치게 설치거든 나직하게 중얼거려라. 세계는 당신 것인지 몰라도 삶만큼은 내 것이다.
김영민, <가벼운 고백> 135쪽
싱숭생숭한 밤이 지나갔다. 계엄령 선포 뉴스를 생중계로 보고 있던 밤 11시. 중학생 큰 아이는 방에서 기말고사 공부를 하고 있었고, 초등학생 동생들은 이미 잠든 뒤였다. 남편은 심각한 표정으로 안방에서 뉴스를 보고 있었다. 나는 티브이 소리가 아이 방까지 닿지 않게 하려고 조용히 안방 문을 닫았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날의 공부를 마치고 평화로이 잠에 들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아이들의 숨소리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새벽 1시에 계엄령 해제 의결 뉴스를 보고 침대에 누웠지만 한껏 긴장하고 흥분했던 마음 때문인지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혹시 내가 잠든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불안하기도 했고, 국회의 해제 요구에 대통령이 불응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하며 혼자서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나처럼 잠 못 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 밤을 뜬눈으로 지새울까. 입대한 군인 아들을 둔 어머니의 속은 얼마나 타들어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겨우 잠에 들었다.
누가 내 방에 CCTV를 달았을까
이런저런 일이 있었던 역사적인 밤이었지만, 아이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와 아빠의 얼굴에만 피곤이 짙게 깔려있을 뿐. 괜스레 이런 별일 없는 일상이 더없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더 꼭 힘주어 아이들을 안아주었고, 평소엔 챙겨주지도 않던 남편의 아침식사를 챙겨 보냈다. 그리고 현관으로 달려가 대통령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실린 조간신문을 가져왔다. 신문사 기자들의 야근의 흔적이 서려있는 신문기사 1면을 보면서 단 한 사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의 평안한 밤이 희생되었는가 생각하였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분명 간밤의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할 텐데. 혹시나 아이들이 어른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잘 모르고 과장해서 이야기하거나,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끼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워서 뭐라도 엄마의 언어로 이 상황을 설명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제대로 설명하는 일은 언어의 빈약함과 역사적 배경지식의 부재로 대 실패. 아이의 눈높이에서 '계엄'을 설명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비상시국이 아닌데 비상계엄이 선포된 아이러니에 대해서 설명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나마 중학생 큰 아이는 아침식사를 하며 조간신문을 빠르게 스캔한 덕분에 약간의 배경지식을 갖춘 후 등교했는데, 현관을 나서며 약간의 기대감을 담아 '다음 주 기말고사가 취소되지는 않겠죠?'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응. 기말고사는 아마 별일 없이 다음 주에 시행될 거야. 얼마나 감사한 일이니. 그러니 평소처럼 시험과 과제를 준비하며 차분히 일상을 이어가기를.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는 한밤의 계엄령은 해제되었고 오늘도 익숙한 하루는 시작되었다. 이 느닷없는 계엄 선포로 벌렁거렸던 심장을 다독이며 김영민 교수의 문장을 읊조려본다. "권력자가 지나치게 설치거든 나직하게 중얼거려라. 세계는 당신 것인지 몰라도 삶만큼은 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