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아는 다정한 지구인이었으므로, 거기까지 듣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럼 왜 경민이 얼굴로 왔어? 물론 처음에 널 봤으면 꽤 놀랐겠지만...... 정우성 얼굴로 올 수도 있었잖아!" 한아는 경민을 빙자해 다가온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건 아무리 봐도 사기였다. 우주적 사기.
정세랑, <지구에서 한아뿐> 104쪽
소설을 읽다가 멈칫, 했다.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연일 뉴스를 뜨겁게 달구는 화제 속의 그 이름이 수년 전에 출간된 소설 속에 실려 있었다. '누가 봐도 잘생긴', '누구에게나 호감인 얼굴'의 은유로 어떤 유명 배우의 이름을 소설 속에 썼을 뿐인데, 이제는 그의 이름에 새로운 의미가 담겨버렸다.
며칠 전 읽었던 머니투데이의 기사에는 '사실은 음흉한 속내의 발견'이라던가 '지고지순한 이미지에 대한 배신감' 따위의 표현들이 그를 설명하는 문장으로 실려 있었다. 어떤 일이든 진정성과 일관성을 지켜온 듯한 그의 이미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그 배우가 이미지메이킹을 의도적으로 해 왔던 것일까, 아니면 대중이 그 배우에게 바라는 이미지를 스스로 만들어냈었던 걸까.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이름에는 새로운 의미들이 더해져 버렸고, 소설가가 실존 인물의 이름을 자신의 작품에 차용한다는 건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생존 인물을 자신의 작품 속에 썼을 때, 작가는 그가 오랫동안 별다른 사건사고와 논란 없이 쭉 선한 이미지를 유지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 길 물속 보다도 알기 어려운 게 한 길 사람 속이라 하던가.
나 역시 평범한 대중 중의 한 명이므로, 그들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공개된 공간에 뭐라고 말 한마디 보태기가 조심스럽다. 다만 정우성이라는 가십이 소비되는 요즘의 모습을 보면서 혼외자의 임신과 출산이라는, 아직은 대한민국에서 상대적으로 덜 논의된 이야기를 다루는 방식에 아쉬움이 많다. 아무도 태어난 아이의 행복을 최우선적인 과제로 생각하지 않고, 생부의 여성 편력만 유달리 강조하는 방향으로 여론이 형성되는 현상은 안타까울 뿐이다.
생부나 생모의 책임을 다루는 영역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적 아버지로서의 책임이라는 부분에 경제적 책임이 있다는 건 일단 알겠는데, 과연 한 명의 아이를 키우는 데에 경제적인 요건만 충분하면 별 탈 없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 현 대한민국의 현실일까? 내 남편이 생물학적 아버지로서의 책임은 다하겠다며 양육비만 주어도 나는 욕하지 않고 그 사람의 앞날을 응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이번 일로 인해 전 국민이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알게 되었는데, 아이는 실수였고, 원치 않는 생명이었고, 아이 엄마는 단순한 잠자리 상대였다는 표현들이 이렇게 언론에 낱낱이 공개되어도 정말 괜찮은 걸까? 제발 엄마도, 아빠도 아이의 행복을 최우선적인 과제로 고민하고 처신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나의 바람은 너무 순진하고 이상적인 걸까?
그저께 청룡영화제에서 정우성 배우는 '아버지로서, 아들에 대한 책임은 끝까지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부디 그 책임이 양육비뿐만이 아니라 제대로 된 '아빠 노릇'이었으면 좋겠다. 대부분의 혼외자의 출산을 생각해 보면 피임, 원치 않는 임신, 그리고출산에이르는거의 모든 영역에서 여성은 여전히 약자의 위치에 서 있고 유달리 여성의 책임만강조되는 추세인데, 상대적으로 한 발 물러서 있는 '남성의 책임'이 무엇인지 그가 좋은 선례를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자신의 삶으로 노력을 증명할 때에야 그의 이름에는 또 다른 의미가 담기지 않을까. 부디 소설가가 개정판에서 새로운 배우의 이름을 차용해야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위선적이어도 좋으니 부디 그가 선한 방향으로 자신의 책임과 역할에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 모든 그 시선을 감당하며 성장해야 할 아이가 구김 없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자신이 가진 자원을 아낌없이 투자했으면. 그리고아이가 부디 꿋꿋하게 잘 자라날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