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정현 Dec 18. 2024

생나무 크리스마스트리

<눈부신 안부>에서 만난 문장


 그 해 겨울, 이모는 우리를 위해 아주 커다란 전나무를 구해다가 거실 한구석에 세워놓았다. 그것은 플라스틱 트리가 아니라 정말 살아있는 나무였기 때문에 천장에 닿을 것처럼 거대한 나무를 처음 보았을 때 해나는 "엄마 이거 진짜 나무야!"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깡충깡충 뛰었다. 스위치를 누르면 조명이 반짝이던 그 크리스마스트리는 우리에게 이제 행복해질 일만 남았다고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여주는 것만 같았다.

백수린, <눈부신 안부> 46쪽


 폴란드에 사는 동안에는 거의 매 겨울마다 생나무로 된 크리스마스트리를 샀다. 내가 바르샤바로 이사했던 건 12월의 첫날이었기에, 폴란드에 도착하자마자 도시는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했다. 언제든 집 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면 그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을 텐데, 그 첫 해의 겨울에는 집에서 한 블록만 바깥으로 나가는 일도 너무 무서워서, 너무 추워서, 너무 어두워서 집 안에만 있었다. 너무 어렸던 세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하는 게 아주 대단한 미션처럼 느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랬던 그 해 겨울에, 남편이 생나무 크리스마스트리를 사 왔다.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랴, 함께 이사 온 식구들을 챙기랴 그에게도 바쁘고 정신없었을 12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다 보니 어느새 성탄절 아침이 되었고, 폴란드에서 맞이하는 첫 휴일 아침에야 비로소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트리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25일 날 아침에 남편이 큰 아이를 데리고 마트 앞 공터에서 내 가슴께쯤 오는 130cm의 작은 트리를 사 왔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사려면 25일 전에 샀어야지, 25일 당일에 사는 트리는 정말 땡처리 중에 땡처리였을텐데. 남편은 단돈 몇 즈워티라도 깎았으려나? 아마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늦게나마 우리 집에서 함께하게 된 작은 크리스마스트리 덕분에, 일상이 조금 덜 고달팠던 것 같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 머무는 시간이 한없이 길었던 2020년에는 미친 척하고 2미터가 넘는 커다란 트리를 샀다. 2020년은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비대면으로 전환되는 시기였고 크리스마스트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 이상 마트나 동네 공터에서 트리를 파는 상인들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11월부터 온라인으로 생나무 트리를 파는 쇼핑몰 광고가 내 SNS 피드를 도배하기 시작하였다. 그중에 가격이 괜찮아 보이는 사이트를 하나 골라, 제대로 오는 게 맞을까 반신반의하며 트리를 시켰다.


 며칠 뒤, 정말 커다란 트리가 배달되었는데, 2미터가 넘는 큰 트리다 보니 체격이 좋은 아저씨 둘이서 끙끙대며 들고 오셨다. 어디에 펼쳐놓을까? 하고 물어보시는데, 거실에 트리 놓을 장소를 미리 정리해두지 못한 나는 그냥 현관에 둬 달라고 이야기했다. 정말 그래도 되겠냐고 아저씨들이 두 번이나 거듭 물어보았을 때 그게 옳지 못한 대답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야 했는데. 생나무 크리스마스트리는 배달할 때나 구매할 때는 양파망 같은 네트에 돌돌 말려 포장되어 오는데, 포장을 벗기는 순간 정말 아름다운 수형(形)이 공작새 꼬리처럼 팡하고 펼쳐진다. 근데 그걸 현관에서 펼쳐버리면... 그 공작새 깃털 같은 아름다움을 보전하며 트리를 옮겨야 한다. 나중에 좁은 복도를 지나 거실 안쪽까지 옮기는데, 크고 무거운 것도 문제였지만 천장 조명과 거실 가구들에 부딪칠 때마다 전나무 잎사귀가 우수수수 떨어졌다. 여기서도 사르륵, 저기서도 사르륵. 온 거실에 쏟아진 생나무 잎사귀를 치우며 나는 현관에서 나무 포장을 미리 벗겨버린 걸 후회하고 또 후회했지만 생나무 트리를 산 것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았다. 집 안에 은은히 퍼지는 나무 향기와 진짜 살아 있는 나무가 주는 운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었으니까.



  올해는 크리스마스트리를 사지 않았다. 썩지 않는 플라스틱 트리를 사고 싶지 않았다. 플라스틱 트리도 한 번 구매해서 10년 이상 쓰면 생나무 트리를 쓰는 것과 비슷한 환경보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들은 적이 있지만... 자연에서 얻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진짜 나무 트리를 구할 수 있다면 구하고 싶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생나무 트리'로 검색을 하니 영국, 미국, 캐나다 등 각지의 트리 농장에서 나무를 구매한 포스팅이 가득했다. 한국에서 구매한 후기는 없었다. 왜 한국은 없을까. 왜 우리나라에서는 진짜 전나무로 된 트리를 구할 수 없을까.


 정말 살아 있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다시 한 번 집에 들이고 싶다. 서울에서 아파트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어렵겠지? 아파트 복도 엘리베이터에 생나무 트리를 들고 오며 우수수 잎사귀를 떨어뜨리는 상상을 하니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다는 생각과 들어 쓴 웃음이 피식 나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