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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봄을 그리 쉽게 놓아주겠어

<아침산책>에서 만난 문장

by 주정현 Mar 18. 2025


 바람이 쌩하고 분다. '삼월 추위가 장독 깬다'는 말이 있다. 만개한 벚꽃 위에 눈이 수북하게 쌓인 적도 있었다. 큰집의 난로 연기가, 춥다! 추워! 하며 풀풀 흩어진다.
 앞산을 보니 먼동이 터 온다.
 언 땅 풀리고 개구리 울면 봄이다, 하다가도 다시 찬바람이 불어 몸을 움츠린다. 사람들은 겨울이 봄을 그리 쉽게 놓아주겠어,라고 말한다. 그런 말들을 주고받는 사이 또 며칠 춥고 따뜻한 날들이 지나간다.

김용택, <아침산책> 28쪽


 분명 봄이 왔다고 생각했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낮 기온이 15도를 웃돌았고, 집 앞의 산수유나무 가지 끝에는 노란빛이 감돌았으니까. 두꺼운 외투를 벗어던진 사람들도 많았고 심지어 반팔 차림의 10대들도 종종 보였다. 그러나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오늘 아침. 기온은 다시 영하로 떨어졌고, 바람은 매섭게 분다. '오늘이 정말 3월 18일이 맞지...?' 하며 달력을 다시 확인해 본다. 도무지 봄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한겨울의 모습.


 올해 한국의 겨울은 폴란드만큼 눈이 많이 내리는 것 같다. 11월의 폭설부터 시작해서 3월의 대설주의보라니. 2년 전이었던가, 봄기운이 완연했던 4월 1일, 바르샤바에 기습적으로 폭설이 내렸던 적이 있었다. 마침 한글학교 수업이 있는 토요일이라 커다란 스노부츠를 신고 눈을 푹푹 밟으며 학교에 출근했다. "지금까지 봄인 줄 알았지? 사실 거짓말이란다." 하고 동장군이 만우절 장난을 치는 것 같다며 학생들이랑 농담을 주고받았다. 마지막 눈싸움을 하고, 마지막 눈사람도 만들고, 눈이 정말 많이 와서 이글루까지 만들었던 4월. 그렇게 웃으며 마지막 겨울을 만끽했던 봄날이 생각나는 아침이다. 오늘 한국에서 마주한 풍경도 딱 그렇다.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는, 봄을 그리 쉽게 놓아주지는 않을 거라는 겨울의 마지막 몸부림.


 오늘 아침, EBS 라디오의 <모닝스페셜>을 듣는데, 오늘의 '무모한 문장'(매일 영작해야 하는 미션 문장)은 "패딩 안 집어넣길 잘했네."였다. 나는 그 문장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집어넣지 않은 게 아니라 아예 집 밖으로 내보낸 사람이 여기 있는데. 나는 지난주의 따뜻한 봄날씨를 보고 겨울이 드디어 끝났구나 싶어 안도하며 가족들의 롱패딩을 모두 세탁소에 맡겼다. '패딩은 이제 끝'이라는 마음으로. 그런데 일주일 만에 다시 그 패딩이 절실해질 줄이야. 그나마 '꽃샘추위'를 예상하며 경량패딩은 남겨둔 게 다행인 걸까.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게 아니라 아예 꽃을 눈으로 덮어버리는 추위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비단 날씨만 그럴까. 우리의 삶도 이렇게 계절처럼 변덕스럽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 같다가도 예상치 못한 변수에 휘청거리고, 철저히 계획했던 일들이 어느 순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때로는 확실해 보였던 일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기대했던 순간이 아쉬움으로 변하기도 한다. 마치 따뜻한 봄날이 찾아올 줄 알았는데 갑작스럽게 꽃샘추위가, 아니 꽃샘함박눈이 닥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계절이 그렇듯, 삶도 결국 흘러간다. 겨울이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봄이 오는 걸 막을 수는 없듯이 힘든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때로는 다시 추운 날씨가 찾아와도 그것은 봄을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대비되도록 만드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겨울이 다시 찾아온 듯 하지만 며칠 뒤에는 다시 따뜻한 바람이 불겠지. 왠지 그 봄바람은 더 반갑고 고맙게 느껴질 것 같다.


 롱패딩이 없으니 옷장을 뒤적여 패딩만큼은 따뜻하지는 않더라도 최대한 포근하게 오늘의 옷차림을 완성한다. 두꺼운 후리스, 기모 맨투맨, 경량 패딩을 겹쳐 입고 목도리에 장갑까지 꺼내주며 아이들을 달랜다. "오늘은 조금 춥지만, 그냥 겨울이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거라고 생각하자."하고. 오늘은 조금 춥겠지만, 마음만은 따뜻하게 하루를 보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근데 겨울이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게 맞겠지?



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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