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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에 집중하는 교육

육각형 인간이라는 환상

by 주정현


지난여름방학을 앞두고 아이가 다니는 영어 학원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식 문법'이 부족하니 이번 여름방학에 개설되는 문법 특강을 들어보라는 권유였다. 정중히 에둘러 거절하고 전화를 끊는데 마음속에서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우리 아이는 외국에서 아홉 해를 살았다. 영어로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원어민과 큰 어려움 없이 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가 편안한 아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에게마저도 부족한 부분을 기어코 찾아내어 방학 특강을 권유하다니. 그것도 '한국식 문법'이라는 단어를 들어가면서. 영문법이면 그냥 영문법이지 한국식 영문법은 또 무엇이며, 그 지식이 부족한 건 또 뭐란 말인가. 관계대명사라는 단어는 모르지만 관계대명사를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되짚어 생각해 보니 이 날의 에피소드는 한국식 사교육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것 같다. 학원은 늘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고, 그 결핍을 채워야 한다는 압박을 학생과 학부모에게 주며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낸다.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기 위한 그 과정 속에서 부모는 아이가 이미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에 주목하게 되고, 아이 본인은 자신을 결핍된 존재로 바라보게 된다.




외국에서 살면서 여러 선생님들과 상담을 할 때의 경험은 달랐다. 매 학기 두 번씩 있는 학부모 상담에서 이야기의 중심은 아이가 무엇을 잘하는지, 어떤 활동에서 몰입과 즐거움을 느끼는지였다. 항상 학부모 상담은 나-아이-교사 이렇게 3명이 모여서 삼자대면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래서 Three-Way Conference라고 불렀다.) 교사는 아이가 보여주는 고유한 특성과 관심에 귀를 기울였고, "너는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니?"라는 질문을 자주 던졌다. 그 속에서 아이는 자신이 가진 재능을 발견하고, 그 장점을 더욱 깊게 개발할 기회를 얻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와 관심사를 얘기할 때마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너무 반짝반짝해서, 상담 시간에 그런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매 학기 나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폴란드에서 받았던 교육은 무언가를 가득 채워야 한다는 강박 대신, 아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씨앗을 북돋우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아이가 좋아하는 활동이 곧 학습의 길이 되었고,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하나씩 쌓다 보면 부족한 점이 학습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보완되었다. 무엇보다 아이는 자기 스스로를 긍정하며 배움 자체를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으로 성장했고, 새로운 영역에도 도전장을 내밀 수 있는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가진 아이로 자라났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에 돌아오자 교육의 목적과 중점 자체가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와 학원은 끊임없이 부족한 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보충해야 한다는 논리를 강화한다. 100점 만점의 지필고사에서 아이가 문제 하나를 틀려 96점을 받았는데, 아이가 잘 풀어낸 19개의 문제가 아니라 백 점을 맞는데 실패했던 그 나머지 한 문제만을 이야기한다. "이번에 비문학 지문에서 틀린 문제가 많았어요. 그 부분을 더 꼼꼼히 챙길게요.", "독해 능력은 뛰어난데, 문법 지식이 조금 부족해요. 문법을 더 많이 공부해야겠어요." 아이의 하루는 '결핍 보충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문제는 아이의 자존감 손상이다. 어떤 아이도 모든 영역에서 완벽할 순 없다. 누군가는 언어적 재능이 두드러지지만 수학적 사고는 약할 수 있다. 또 어떤 아이는 음악이나 체육에서 뛰어난 성취를 보이지만 국영수 과목에는 흥미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식 교육은 이러한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과목에서 평균 이상이 되지 않으면 '부족한 학생'으로 낙인찍는다. 그리고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끝없이 사교육의 쳇바퀴를 돌린다. 국어 점수가 낮으면 국어학원, 수학이 약하면 수학 과외. 영어에서 말하기가 부족하면 스피킹, 문법이 약하면 문법특강.


그 결과 아이들은 자신을 늘 '부족한 존재'로 인식한다. "나는 수학이 약해.", "나는 문법이 부족해.", "나는 평균에 못 미쳐."라는 자기 진단이 반복되면서, 자기 긍정은 사라지고 자기 비하가 자리 잡는다.


이런 장면을 볼 때마다 한국 교육이 추구하는 이상형은 모든 영역에서 고르게 발달한, 소위 '육각형 인간'이 아닐까 싶다. 국영수뿐만 아니라 예체능까지, 어느 한 부분도 뒤처지지 않는 완벽한 인재상을 꿈꾼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 사고력수학, 독서논술, 피아노, 태권도, 미술학원 등등 거의 모든 영역의 사교육을 두루두루 받으며 '균형 잡힌' 인간으로 성장하고자 한다. 모든 영역이 고르게 발달한 완벽한 아이.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아이는 드물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특정 영역에서 강점을 보이고, 다른 부분에서는 상대적으로 약점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은 아이들을 그 '육각형 인간'의 이상형에 맞추려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이가 스스로 가진 강점을 깊이 탐구하거나 몰입할 기회는 줄어든다. 오히려 어느 정도 깊이에 이르면 "피아노는 그 정도까지 배우면 됐어. 이제는 더 공부에 힘써야 할 나이니 수학학원을 다니자."라며 아이를 안으로 향하던 집중의 자리에서 바깥으로 끌어낸다. (그래서일까, 우리 둘째가 다니는 성악 클래스에는 고학년 언니들이 없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을 끌어올리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며 아이는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기회를 상실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한국에 돌아온 지 1년쯤 되었을 때, 나 역시 어느새 그 시선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취약점을 보완하는 교육. 아이를 바라보는 내 눈은 점점 ‘결손’을 찾아내는 안경으로 바뀌었다. 어떤 과목에서 점수가 떨어지면 원인을 분석하고, 친구들보다 뒤처지는 부분이 보이면 마음이 불안했다. 아이가 가진 장점보다는 결점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 결점을 메우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은 강박이 생겼다. 육각형 인간, 즉 어느 한 꼭짓점도 유난히 크거나 작지 않은 이상적인 도형. 하지만 나는 점점 그 균형이라는 이름 아래서 아이를 ‘채워야만 하는 인간’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모자란 곳을 메우기 위해 끊임없이 단련해야 하고, 부족한 부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긴장해야 하는 삶. 아이에게 그 잣대를 들이대면서, 나 자신을 향해서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다.


그 완전한 육각형은 정말 존재할까? 현실적으로 가능한 걸까?




이러한 결핍 중심의 교육에는 몇 가지 부작용이 있다. 그중 가장 큰 피해는 공부 정서의 훼손이다. 결핍을 메우는 데 초점을 둔 교육은 아이의 마음에 조용한 균열을 낸다. 배움이 즐거움이 아니라,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고된 보충의 시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이게 공부는 점점 부담이 되고, 결국 흥미는 사라진다. 배우는 즐거움이 사라진 자리에는 ‘뒤처지면 안 된다’는 긴장감만 남는다.


또 다른 부작용은 아이가 자기 스스로를 탐색할 기회를 놓친다는 것이다. 심리상담을 하다 보면, 청소년기에 이러한 자기 탐색의 시기를 제대로 갖지 못한 채 성인기까지 유예한 사람들을 생각보다 자주 만난다. (어쩌면 나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활동에 몰입할 수 있는 사람인지 탐구할 수 있는 시간은 ‘결핍 보충’의 시간에 밀려 사라진다. 모두를 평균 이상으로 만들려는 사회적 압박 속에서, 각자의 고유한 색깔은 점점 옅어져 간다.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는 동안, 학교 현장에서 선생님들이 끊임없이 던졌던 질문은 '너는 무엇을 잘하니?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니?'였다. 반면 한국에서 아이가 받는 질문은 정반대이다. '너는 무엇이 부족하니?', '어디가 취약하니?'. 이 두 가지 질문은 아이의 자기 인식에 결정적인 차이를 만든다. 전자는 아이를 '가능성의 존재'로 바라보게 하고, 후자는 아이를 '결핍의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전자는 아이에게 자부심을, 후자는 열등감을 낳는다.


영어 학원의 문법 특강 권유를 들었던 그날 저녁, 아이와 함께 산책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 아이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문법 수업이 아니었다. 아이가 이미 잘하고 있는 영역에서 자신감을 키우고, 즐겁게 몰입할 수 있는 경험을 늘려 주는 것이 더 본질적인 교육이었다. 부족한 점을 끌어올리는 데 에너지를 쓰기보다, 잘하는 것을 더 깊고 넓게 발전시키는 것 — 그것이야말로 아이의 성장을 이끄는 길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여름방학, 문법 특강 대신 원어민 선생님과 함께하는 영어 소설 북클럽에 아이를 등록시켰다. 아이는 그 시간을 무척 즐거워했다. 좋아하는 소설책을 실컷 읽고, 읽은 내용을 이야기하며 영어가 ‘공부’가 아닌 ‘언어’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식 문법 수업을 들으라는 권유 전화는 계속 오고 있다. 한 번은 들어줘야 이 전화가 끝이 나려나...)


교육은 아이를 '부족한 존재'로 바라볼 때 파괴적이다. 그러나 아이를 '가능성의 존재'로 바라볼 때, 그 교육은 아이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한국 교육이 결핍 중신에서 벗어나, 각 아이의 강점과 개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아이가 평균 이상 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강박에서 벗어나, 각자의 가능성을 존중하고 아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힘을 줄 수 있기를. 공부가 결핍을 채우는 고된 과정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빛을 더 밝히는 즐거운 여정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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