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협력을 배우는 첫 번째 사회
나는 미국 어느 인디언 보호 구역의 학교에 새로 부임한 백인 교사의 일화를 늘 가슴에 품고 산다. 시험을 시작하겠다고 하니 아이들이 홀연 둥그렇게 둘러앉더란다. 시험을 봐야 하니 서로 떨어져 앉으라고 했더니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이렇게 말하더란다.
"저희들은 어른들에게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함께 상의하라고 배웠는데요."
최재천, <숙론> 85쪽
최재천 교수의 책, <숙론>에서 만난 짧은 일화는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예전에도 이 책의 문장을 인용해서 글을 한 번 쓴 적이 있었다. 그때는 홀로서기 교육과 함께하기 교육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는데, 산업화 시대 이후에 시스템이 만들어진 근대 교육을 받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인디언 보호 구역의 교육 철학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혼자 잘하는 것보다 함께 협력해야 한다는 것. 삶에서 맞닥뜨리게 될 어려움의 해결책은 '함께'에 있다는 것.
어쩌면 삶이란 본질적으로 '함께 해결해야 하는 문제' 투성이 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배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공지능이 지식을 대신해 주는 시대에,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함께 생각하고, 함께 해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1초 만에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지식을 달달 외우는 것보다,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배움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예전 글에서도 한 번 썼지만, 인디언 교실에서 일어난 일과 비슷한 사례를 아이가 다니던 IB 국제학교에서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초기 문해력 교육’을 주제로 한 공개 수업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둘째 아이가 재학 중이던 2학년 교실은 책상 줄이 아니라 작은 원형 테이블로 가득했고, 아이들은 서로 다른 언어와 배경을 지닌 친구들과 짝을 이루어 과제를 수행하고 있었다. 영어가 유창한 아이,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아이, 학습에 어려움이 있는 아이까지 교실에는 다양한 아이들이 모두 섞여 있었다. 그 누구도 혼자 과제를 하지 않았다.
그날의 수업 주제는 초기 읽기 활동을 위한 과제로 비슷한 발음을 가진 단어를 짝지어보는 활동이었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짝꿍과 토론하며 답을 찾으라고 했다. 모범 답안은 없었다. 대신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며 스스로 정리해 보는 것이 중요한 수업이었다. 아이들은 테이블에 앉거나, 소파에 기대거나, 카펫에 엎드려 자유롭게 토론했다. 교실은 정숙이 필요한 아니라 대화와 논쟁의 공간이었다.
솔직히 말해 한국인 부모의 눈으로는 이 풍경이 다소 낯설고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정확한 답이 있는 과제를, 알파벳에 대한 음가를 판서식으로 가르쳐주면 되는 문제를 왜 굳이 느리고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풀게 할까? 혼자서 하면 5분이면 될 문제를 짝꿍과 머리 싸매느라 15분, 20분씩 쓰는 게 과연 효율적인가? 그렇다면 선생님의 존재 의미는 뭐지? 그런 의문을 속으로만 간직한 채 나의 불만은 유럽 특유의 문화에 적응하지 못한 한국 학부모만의 생각인 줄 알았는데, 교실 뒷줄에 함께 앉아있던 우크라이나 학부모(즉, 구 소련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학부모)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이러한 IB 수업 방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굳이 이런 수업마저 토론식으로 진행하는 이유가 뭐죠?"
협력은 말처럼 이상적이고 쉽지만은 않다. 사실 현실 속의 협력이 늘 공정하거나 효율적이지만은 않다. 누구나 다 대학시절 팀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혼자 다 하면 더 빨리 끝날텐데." 팀 프로젝트지만, 조원 중 누군가는 마감이 코앞인데도 자료를 안 올리고, 또 누군가는 회의 시간마다 자기 의견만 고집했다. 누군가는 연락도 없이 모임에 불참하는 경우도 있었고, 결국 마감 직전까지 조장인 내가 밤을 새워 정리해야 했야만 했던 작업. 그렇게 완성한 결과물에는 내 노력과 다른 사람의 이름이 똑같이 적혔고, 그게 늘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나는 오랫동안 '협력'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그건 듣기 좋은 구호일 뿐 실제로는 책임 회피나 무임승차를 부르는 말 아닌가'하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런 우리의 의문에 대한 교사의 설명은 명확했다.
“우리가 학교라는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맞닥뜨리는 현실 세계에는 ‘너 혼자서만 해결하라’는 문제는 거의 없습니다. 아이들이 배워야 할 것은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법, 제대로 커뮤니케이션하는 방법입니다. 함께 문제를 해결하면서 서로 잘 지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비효율과 불완전함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 또한 필요합니다. ”
선생님의 말을 들은 순간 머리를 한 대 쌔게 맞은 느낌이었다. 나는 이게 문해력 수업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사회성-커뮤니케이션 수업이었구나. 그녀의 말은 곧 사회가 요구하는 진짜 능력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협력은 효율을 위한 방식이 아니라, 관계를 배우기 위한 과정이었다. 서로 다른 속도를 가진 사람들과 의견을 맞추고, 실망을 겪고,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함께 무언가를 완성하는 일. 누군가는 더 많이 일하고, 누군가는 슬쩍 무임승차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불균형을 경험하는 과정 자체가 교육이다. 그 안에서 아이는 타인의 책임감, 신뢰, 배신, 그리고 회복마저도 모두 배운다.
그건 시험 점수로는 측정할 수 없는 배움이다.
한국에 돌아와 다시 마주한 학교 현장은 내가 어릴 적 다녔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경쟁적이고 고립된 구조로 변해 있었다. 레벨 테스트 결과로 반을 나누고, 시험 점수로 아이들의 수준을 가른다. 그 안에서 아이들은 자기 속도대로 성장하기보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 질주하듯 내달린다. 우리 교육은 여전히 아이들을 '혼자 잘하는 아이'로만 길러낸다. 문제를 혼자 풀고, 시험을 혼자 치르고, 결과는 등수로 줄을 선다. 경쟁의 구도 속에서 협력은 낭비로 취급 뇐다. 그 속에 놓인 아이들이 협력의 진짜 가치를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얼마나 될까.
물론 시험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정확한 지식의 습득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단순히 정답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모호한 문제를 여러 사람과 협의하며 해결할 줄 아는 사람을 원한다. 기술과 정보는 AI가 더 빠르게 습득할 수 있는 시대다. 그 안에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함께하는 능력’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할 줄 아는 아이가 결국 더 멀리 갈 수 있다. 세상은 '정답'을 혼자 잘 외운 사람보다 '불확실한 상황'을 남과 함께 헤쳐나갈 줄 아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려면? 연습과 실패가 필요하다.
협력도 다른 역량과 마찬가지로 태어나자마자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본능이 아니다. 연습해야 하고, 실수도 해봐야 하고, 경험 속에서 시행착오를 통해 배워야 한다. 그렇다면 학교는 그런 연습이 가능한 공간, 실패해도 괜찮은 협력의 장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끼리 다른 의견을 주고받고, 서로 설득하고, 때로는 부딪히면서 배우는 곳. 그것이 ‘진짜 공부’다.
그리고 학교만큼 아이들이 안전하게 실패할 수 있는 장소가 또 있을까. 그런데 지금의 학교는 아이들이 실패하기엔 너무 위험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시험 점수 하나가 인생의 향방을 결정짓는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점점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해야 한다. 친구는 협력해야 할 동료가 아니라, 앞서거나 뒤처질 경쟁 상대가 되어버린다. 이런 환경에서 협력을 배운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협력은 성적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힘이다.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은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고, 신뢰를 배우며, 갈등을 감당하는 법을 익힐 수 있다. 이런 경험이 쌓여야 진짜 사회성이 생기고, 진짜 창의력이 자란다.
나는 아이들이 다니는 교실에서, 시험지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답을 함께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게 인디언 보호 구역의 학교에서든, 국제학교에서든, 혹은 바로 우리 동네 초등학교에서든 말이다. 협력이 부정행위가 아닌 기본이 되는 수업. 그 안에서 자란 아이들이야말로 앞으로의 세상을 이끌어갈 진짜 리더가 되지 않을까. 그런 교실에서 자란 아이는 세상 속에서도 타인을 경쟁자가 아닌 동료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교육의 진짜 목적이 아닐까.
경험담에 살짝 덧붙이는 이야기 _
본문에 등장했던 우크라이나 학부모(즉, 구 소련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학부모)는 그날 공개수업을 보며 이런 이야기도 나눠주었다. "라뗴는 말이야, 그냥 선생님이 몽둥이 들고 다니면서 외우라고 시켰고, 틀린 만큼 얻어맞았는데- 우리 아이들은 참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배우네요."
그의 말을 경악스럽게 듣는 프랑스 학부모와 캐나다 학부모 옆에서 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스킨헤드의 그에게 남모를 내적친밀감을 쌓았다. (저도 학교 다닐 때 야구빠따(!)로 많이 맞았어요! 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조신한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어서 참았다.) 어린 시절 체벌이 당연했던 90년대의 한국 학교의 분위기가 구 소련과 많이 닮았있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