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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지 바깥의 세계

모두가 같은 답을 고르는 것이 공부의 목표라면

by 주정현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아이가 다니는 국어학원 선생님으로부터 상담 전화가 걸려왔다. 방학 동안 학원에서 언어영역 모의고사 특강을 들었던 첫째 아이의 학습 내용과 특징에 관한 이야기였다. 선생님은 지적은 딱 하나였다. 아이가 지문을 남들과는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이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 이견이 없는, 정확하고 안전한 답을 고르는 것이 시험의 목표 - 그리고 수업의 목표 -인데, 아이는 오히려 자신의 독창적인 관점을 문제에 투영한다고. 이로 인해 아이의 선택이 높은 점수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해외에서 8년을 보낸 아이는 그동안 "네 생각은 무엇이니?", "너만의 고유한 관점은 무엇이니?"를 끝없이 요구받고 질문받는 환경에서 성장했으니까.




아이가 한국에서 국어 학원을 다닌 지도 어느새 일 년이 지났다. 현재 중학교 2학년인 큰 아이는 작년 여름에 귀국하기 전까지 학령기 내내 폴란드에서 살았다. 폴란드에 사는 동안 우리 아이들은 학습과 관련된 사교육을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한국만큼 다양한 사교육 기관이 폴란드에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어의 제약으로 인해 그나마 있는 몇몇 사교육 기관에서조차 수업을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제학교 바깥에서 찾아볼 수 있는 수업은 대부분 폴란드어로 이루어진 수업이었고 영어로 이루어지는 수업조차 찾기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작년 여름, 한국으로의 이사를 앞두고 나는,


"이제 한국에 가면 언어 제약 없이 네가 원하는 걸 배울 수 있어. 운동이 되었든 악기가 되었든. 한국에 가서 학원을 다닐 수 있다면 어떤 걸 다니고 싶니?”


하고 아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의외로 아이는 첫 번째 대답으로 '국어 논술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했다. 예상과는 다르게 예체능 학원이 아니라서 조금 의아했는데 워낙 책을 좋아하는 아이다 보니 논술 학원이나 독서 수업이 궁금하고 다녀보고 싶었나 보다. 아마 운동이나 악기보다도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고 자신의 재능을 뽐낼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한국에 오자마자 국어학원을 가장 먼저 다녔다. 마침 집에서 5분 거리에 전국에 체인이 있는 대형 국어학원이 있었고, 레벨 테스트를 본 결과 꽤 높은 반에 배치되었다.


그렇게 해서 다니게 된 국어 학원. 중학생을 대상으로 한 국어 학원은 아이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혼자서는 절대 읽지 않을 것 같은 두툼한 벽돌책을 숙제로 읽고 (작년에 가장 처음 읽은 책은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였고, 최근에 읽은 책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였다. 중학생인데. ) 독서토론을 하는 것도 커리큘럼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학교 공부를 대비해 국어 문법을 배우고, 언어영역 모의고사를 풀고, 어휘 특강을 듣는 것 또한 학원 수업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는 관형사, 체언 같은 문법 용어의 복잡함에 대해 투덜거리면서도 또 묘하게 이런 한국식 공부를 즐기는 듯하기도 했다. 이 모순적인 즐거움 또한 굉장히 한국적인 것 같다면서. 그렇게 성취와 억압이 공존하는 대한민국의 사교육 생활을 아이는 나름 씩씩하게 버텨내고 있었고 열심히 숙제를 하고 수업을 들었다. 가끔 숙제가 너무 많다며 짜증내기도 했지만, 정기 평가나 경시 대회에서 좋은 결과를 낼 때에는 활짝 웃으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아이는 국어라는 과목의 재미를 잃지 않았고,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1년 동안 아이의 국어 학원을 위해 계속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그런 연장선 상에서 학원에서 모의고사 보충 수업을 들으며 보냈던 중학교 2학년의 여름방학.




그러나 한국식 객관식 시험은 아이가 오랫동안 받았던 IB 교육과 정확히 반대 지점에 있었다. 모두가 같은 정답을 향해 달려가야 하고, 출제자가 숨겨둔 해석의 틀 안에 들어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개별적 상상과 해석은 곧바로 '오답'이 된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해 ‘안전한 답’을 고르는 것이 배움의 목적이 된 공부. 아이는 자기만의 독창적인 해석을 집요하게 밀어붙일 수 없었다. 가끔 자신의 엉뚱한 공상과 상상을 진지함과 농담을 섞어 정답의 여지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시험문제의 정답을 고르는 데에 그건 '불필요한' 생각이었으니까.


다 같이 하나의 정답을 찾아야 하는 공부.


하지만 나는 언어와 문학의 본질은 무한한 해석 가능성에 있다고 믿는다. 시를 읽을 때도, 소설을 읽을 때도, 독자는 자기 경험과 사유를 바탕으로 작품과 대화한다. 그리고 모두의 경험과 생각은 고유하다.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오독은 결코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독서가 주는 기쁨이고,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기 세계를 확장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시험 제도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아이가 이를 납득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학원 상담 전화는 그래도 훈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국어 학원 선생님은 나에게 전화를 하기 전에 먼저 아이와 함께 이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사실 국문학과를 졸업한 선생님 또한 자유롭게 읽고 상상한다는 것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본인도 학창 시절에 그런 스타일의 학생이었다면서 아이에게 '정답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씀하셨다. 다만 시험은 시험답게 전략적으로 다가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어쨌거나 시험 문제는 틀리는 것보단 맞히는 게 훨씬 나으니까.


아이는 여전히 언어영역 지문을 읽을 때마다 남들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독특한 생각을 쏟아내고, 그런 자신의 생각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자랑스러워할 때가 많다. 지문을 읽고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기보다는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투영해 답을 고른다. 논술 시험에서도 마찬가지다. 제시문을 분석하는 방식이 남다르다 못해 독특하다. 나는 그런 아이의 자유로움을, 다른 길로 새어나가는 샛길의 즐거움을 지켜주고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점차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국어라는 과목에는 정답이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는 아이와 함께 나희덕 시인의 낭독회에 다녀왔다. 시집 <시와 물질>에 실린 '밤과 풀'이라는 시를 함께 낭독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자리에서 시인은 뜻밖에도 “이건 술 마시고 집에 들어오던 길에 어리어리하게 보이던 화단의 풀을 보고 쓴 시예요”라고 웃으며 고백하셨다. 그 순간, 아이는 눈을 반짝였다. 시인의 세계가 그렇게 우연과 일상 속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낭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모의고사 문제에서 같은 시를 만나면, 아이는 누구보다도 자신 있게 ‘시인의 의도’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선생님이 사지선다에서 모범적이고 안전한 정답을 이야기하면 (사실 거기에 '시인은 술을 마시고 취했다'... 는 선택지가 있을 것 같진 않지만.) "시인님이 술 드시고 쓴 거라고 직접 말씀하셨어요!”라고 자기가 손 번쩍 들고 말할 거라고. 나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출제자도 '진짜' 시인의 의도는 모를 것이다. 그 또한 오독을 하고 있다. 언젠가 모의고사 문제에서 같은 시를 꼭 만나기를. 나희덕 시인님의 시는 EBS 언어영역 모의고사에도 종종 등장하니, 아이는 정말로 언젠가 같은 시를 만날지도 모르겠다.


모든 독자에게는 자기 방식대로 텍스트를 읽을 자유가 있다. 하지만 한국의 입시 국어에서는 그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다. 학생은 반드시 출제자가 정해둔 의도에 맞춰 지문을 해석해야 하고, 다른 길로 새어나가면 '틀린 것'이 된다. 창작자의 의도도 아니고, 독자의 의도도 아니고, 출제자의 의도가 중요하다. 그 외의 '오독'은 허락되지 않는다.


아이의 독창성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과, 시험 점수를 무시할 수 없는 현실 사이에서 나는 늘 줄타기를 한다. 한국 교육 제도 안에서 아이가 살아가려면 결국 내신을 준비하고, 정답에 가까운 사고방식을 길러야 한다. 삼천포로 빠지는 상상과 4차원적 해석은 그 자체로는 아름답지만 시험지 위에서는 무력해진다. 아이가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수많은 길이 뻗어 있는 세계 속에서 하나의 길만을 강요받을 때 아이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답답함 속에서도 아이가 웃음을 잃지 않기를, 자기만의 해석을 끈질기게 지켜내기를 바랐다. 시험지의 여백이나 마음속 서랍에는 언제나 자기만의 언어, 자기만의 해석을 간직하고 있기를 바랐다. 우리는 작은 공모자처럼 약속했다. “시험은 시험대로 전략적으로 풀되, 네 진짜 생각은 지켜내자. 밖으로는 정답을 내밀더라도, 속으로는 너만의 세계를 계속 키워 가는 거야.” 아이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시험지 바깥에서, 아이의 독창적인 세계가 온전히 펼쳐질 날이 오면 아이의 세계는 더 이상 숨겨진 서랍 속에 있지 않을 것이다. 언어는 결국 해석의 예술이다. 언젠가 시험의 굴레를 벗어나 더 넓은 세계에서 글과 언어를 만나게 된다면, 아이는 지금의 이 고유한 독창성을 다시 온전히 펼쳐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오면, 아이의 독창적인 ‘오독’이야말로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도 스친다. 왜 꼭 그날을 기다려야만 할까. 왜 아이가 지금 당장 서랍을 열어 보여도, ‘틀렸다’는 판정을 받지 않고 ‘새롭다’는 환영을 받을 수 없는 걸까. 시험지의 바깥을 더 늦기 전에 인정할 수는 없는 걸까. 모두가 같은 답을 고르는 것이 공부의 목표라면, 그리고 배움의 목표라면. 우리는 어떤 인간을 길러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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