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돌아온 엄마가 수학 학원 앞에서 멈춰 선 이유
우리 가족은 2024년 6월, 오랜 해외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국 교육 시스템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비교의식이 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집요하게, 오랫동안, 그리고 아직까지도 나를 따라다니고 있는 질문은 이것이다.
"수학 학원 보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중학교 2학년인 딸아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수학학원을 다닌 적이 없다. 처음에는 갈 수 있는 수학학원이 없어서, 그다음은 아이와 나의 선택으로. 일단은 현실적으로 진도에 맞춰 갈 수 있는 학원이 거의 없었다. 우리 가족은 강남 3구 중 한 곳, 그러니까 서울 내에서도 학군지로 손꼽히는 지역 중 한 곳에 살고 있는데 (대치동은 아니지만) 이미 이 지역의 중학생 대부분은 고등 수학 과정을 선행하고 있다. 집 앞 사거리 이름이 '학원사거리'일만큼, 이 동네에는 학원 광고가 넘쳐난다. '수포자 탈출 특강', '심화반 모집'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와 같은 과장된 문구가 빼곡하지만, 막상 아이의 현재 진도에 맞는 수업을 찾으려 하니 해당되는 반은 대부분 초등학생 대상이었다. 중학 수학을 가르치는 클래스의 수업 시작시간이 중학교 하교시간보다 한 시간 더 빠르고, 중학생 대상으로 개설된 학원 수업 중에는 중학 수학을 가르치는 반이 없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쳐왔고, 학부모를 상담한다는 전문가의 탈을 쓰고 있지만, 자녀 교육의 문제 앞에서는 나 역시 평범한 부모로서 갈팡질팡한다. 한국의 교육 환경은 정보의 양도, 속도도, 기대치도 유례없이 높았다. '비교'와 '불안'은 피하려 해도 불쑥불쑥 일상 속으로 침투해 왔다. 초등학생이 중등 과정을 선행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마음 한편이 불편해졌다. 내 아이가 뒤쳐지는 건 아닐까. 지금은 괜찮아도 고등학교에 가서 감당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느리더라도 자신의 학습 경로를 어떻게 설계할지를 고민해 보는 기회를 아이에게서 박탈하는 건 아닐까. 조금 느린 걸음으로 현행을 복습하고, 여름 방학에 한 학기만 선행하며 진도를 맞춰나간다면? 이렇게 이성과 감정 사이를 수십 번 오가며 '개별진도 학원을 보낼까 말까', '과외를 알아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사교육 고민이 시작되면 며칠씩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다 얼마 전, 딸아이와 이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여름에 수학 방학특강을 다녀보는 건 어때? 아니면 대학생 과외 선생님을 알아봐 줄까? 하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묻자, 아이는 "뭐라고? 대학생 과외에에?'하고 처음에는 너털웃음을 짓더니 곧이어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또박또박 자기 생각을 말했다.
"엄마. 내가 어느 책에서 봤는데* 고등학생이 처음 사칙연산을 배운다고 하면 아무리 못해도 5분이면 이해할 거래. 그런데 초등학교 1학년이 덧셈이랑 뺄셈을 배우는 데는 한 학기나 걸리잖아. 아무래도 사고력이나 배경지식, 학습 능력에 차이가 나니까. 마찬가지로 미적분 같은 고등수학 개념도, 초등학생이 배우는 게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겠지. 그런데 고등학생은 같은 개념을 훨씬 효율적으로 배우잖아. 그러니까 수학 학원을 다니면서 선행 학습을 하는 건 오히려 시간을 더 쓰고도 이해가 얕아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나는 남들보다는 조금 진도가 느리더라도 혼자서 해보고 싶어."
(* 내 말버릇이랑 똑같아서 내심 감탄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엄마의 고민을 부질없게 만드는 깔끔한 정리에, 그리고 이렇게 또박또박 자기의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기까지 아이도 스스로 얼마나 고민을 거듭했을까 하는 그 안쓰러움에. 아이의 말속에서 사고의 깊이가 느껴졌다. 아이의 말은 단순한 의견을 넘어서, 자신이 지금 왜 이 방식으로 배우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자각, 그리고 배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깃들어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스스로의 학습 경험을 반추한 흔적이 묻어 있었고, 배움의 적기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태도는 오히려 어른보다 단단해 보였다. 단편적인 논리를 넘어, 배움이라는 것이 인지적 발달과 학습 환경, 심리적 자율성과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설명하는 메타 인지가 느껴졌다. 이건 단지 똘똘한 아이의 발언이 아니라, 학습에 대한 자기 설계와 철학이 담긴 말이었다.
심리학에서는 특정 인지 능력 - 예컨대 추상적 사고력, 작업 기억, 처리 속도 등 - 이 특정 발달 시점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자주 강조한다. 이는 두뇌의 성숙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시기의 심리적 동기, 자율성, 학습에 대한 감정적 태도까지 아우른다. 결국 배움은 뇌뿐만이 아니라 마음이 준비되어 있을 때, 비로소 깊이 있게 흡수될 수 있는 것이다.
해외에서의 교육 경험은 이 점을 실감하게 했다. 아이들이 다녔던 국제학교에서는, 그리고 아이들이 거쳐왔던 IB 프로그램에서는 초등 저학년부터 수학을 선행시키는 경우가 드물었다. 교육의 핵심은 속도가 아니라 사고력의 깊이, 질문하는 힘, 그리고 배운 것을 응용할 수 있는 유연함에 있었다. 아이는 그런 환경에서 배움에 대한 자기 주도성과 흥미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 경험이 아이의 학습 철학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처음 몇 개월은 이 리듬이 깨질까 봐 두려웠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아이들의 불안함이 아니라 엄마의 불안함이었던 것 같다.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입시 지옥을 거쳐온 한국형 엄마의 불안함. 그런 나의 불안함을 누군가는 매우 정확히 꿰뚫고 있어서, 학원 광고지마다 '여름방학이 성패를 가릅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지금을 놓치면 3년 뒤 수능이 달라집니다' 하는 문구들이 넘쳐났다. 아이가 수학을 좋아하는 것도, 그럭저럭 학교 수업을 잘 따라가는 것도 알지만, 혹시라도 주변보다 뒤처지는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아이의 말 한마디가 그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해 주었다.
준비되지 않은 시점의 선행은 때때로 배움의 아름다움과 정수를 훼손시키기도 한다. 학습이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맥락의 문제이며, 개인의 발달 수준과 심리적 수용성의 총합이 만들어내는 정교한 과정이다. 우리는 종종 '지금 안 하면 나중에 못 따라간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히지만, 때로는 그 조급함이 오히려 학습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을 갉아먹는다.
나는 그날 이후, 아이의 공부에 대한 질문을 바꾸었다. "학원을 보내야 할까?"가 아니라 "지금 이 아이에게 어떤 배움의 환경이 가장 적절할까?"로. 그리고 이 질문은 우리 모녀의 학습 여정을 훨씬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지금도 다음 주 기말고사를 앞두고 아이는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혼자 공부한다. 평소에는 학교수업을 충실히 집중해서 듣고, EBS 인터넷 강의를 활용하여 중학교 과정을 학습하고 있다. 나는 매주 금요일 저녁, 아이의 진도표와 오답노트를 함께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평가하지 않고, 조언하려 들지 않고, 그저 아이가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쳤는지 묻고 듣는다(고 쓰지만 아이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틀린 문제에는 답지와 해설지에 쓰여 있는 첫 문장을 적어준다. 그것을 힌트로 아이가 스스로 생각해 본다. 반복해서 틀리는 문제는 함께 풀어본다. 이런 시간들이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배움의 적기'를 더 깊이 이해하는 경험이 되고 있다.
자녀 교육은 결코 정답이 없는 영역이다. 몇 년 뒤에 고등과정을 겪으며 내 생각은 또 바뀔지 모른다. 둘째 아이와 셋째 아이를 키우면서 역시 육아는 '케바케 사바사'라며, 아이의 기질과 발달에 맞춰 또 다른 고민을 시작할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믿는 한 가지는 아이가 배움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자기 속도를 존중하며,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면, 그 아이는 이미 배움의 여정에서 단단한 나침반을 손에 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교육이 아니라, 그 나침반을 믿어주는 어른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에게 그런 어른이 되기로 했다. 조금 느리더라도, 조금 돌아가더라도, 아이가 배움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도록 그저 믿어주는 사람. 선행학습이 가져다주는 조기 성취보다, 자기 주도적 배움의 단단함을 더 오래 품도록 도와주는 사람. 아이가 말한 그 한마디, '배움에는 때가 있어'라는 아이의 통찰이 나에게 새로운 확신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이 한 사람만을 위한 교육을 고민해 왔지만, 결국 이 고민은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부모들에게 닿는 이야기라고 믿는다.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남들보다 늦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배움이 타인의 기준에 맞춰 찢기고 소외되는 일이다. 학습의 속도를 경쟁으로 환산하는 사회 속에서, 내 아이의 고유한 리듬을 존중하는 일은 작지만 단단한 저항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내 아이는 그 저항을 선택했고, 그 선택이 아이에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힘이 되어주기를, 무엇보다도 배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남기를 바란다. 배움은 단지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를 이해하고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배움은 평생 이어지는 여정이고, 나 역시 오늘도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아이와 나는 각자의 리듬에 맞춰, 우리가 선택한 속도로 배움을 이어간다. 서로 다른 속도이지만 같은 방향을 향해 걷는 이 길이, 비록 늘 꽃길은 아닐지라도, 함께 가는 길이길. 가끔은 손을 맞잡고, 서로를 응원하며, 같이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는 그런 모녀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