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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못하는 아이가 체육 만점을 받은 이유

점수라는 그림자 뒤에 숨은 성장

by 주정현


폴란드에 살면서 국제학교에 다니던 4년째 되던 해, 큰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초등학교 과정(PYP)에서 중학교 과정(MYP)으로 진급했다. 초등과정에 다니는 동안에는 매 분기마다 각 영역별로 '잘함', '보통', '부족' 등으로 두루뭉술하게 표시된 성적표를 받았는데, 아이가 중학교에 진급하니 각 과목의 수행과 성취가 7점 만점 중 몇 점, 하는 식으로 전체 점수가 숫자로 표기된 성적표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 6학년 1학기, 한국 나이로는 5학년 2학기에 아이는 중학교 첫 학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큰 아이는 체육 수업에서 만점을 무려 받아왔다. 충격이었다. 7점 만점에 7점이라니. 그 7점이라는 성적표를 받아 들고, 나와 남편은 전산시스템에 오류가 생긴 거 아니야? 우리 딸이 체육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다고? 하며 서로의 눈을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우리 딸은 자타공인 '몸치'이기 때문이다.


대근육 발달이 또래보다 늦어 걸음마를 떼는 것도 만 17개월이 되어서였고, 초등학교 시절 계주 선발 대회 같은 활동에서는 언제나 꼴찌 아니면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성격은 또 얼마나 느긋하고 행동은 굼뜬지. 스피드를 요하는 체육 활동에서는 그런 운동신경의 부족이 더욱 두드러져 체육 시간만 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아이였다. 줄넘기를 배울 때도,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때도, 동생들에 비해 몸을 쓰는 일을 배우는 것은 항상 두 세배씩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자꾸 깎아내려서 미안해 딸. 그렇지만 이건 팩트니까...... 그치?)


그런 아이가 어떻게 체육에서 만점을 받을 수 있었을까?




성적표가 나온 그다음 학기, 학부모 상담 시간에 체육 선생님으로부터 그 비밀(?)을 들을 수 있었다. IB 교육과정에서의 체육 수업, 즉 국제학교 PE(Physical Education and Health) 수업에서는 학생들의 신체 능력뿐 아니라 사고와 협력, 전략적 이해 등 다양한 측면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데 수업의 평가 기준은 크게 다음의 네 가지로 나뉜다.


먼저 Criterion A: Knowing and Understanding은 학생들이 건강과 신체 활동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얼마나 잘 발달시키는지를 평가한다. 단순히 운동 기술이나 체력 수준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다양한 신체 활동의 원리와 규칙, 운동이 신체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능력을 측정한다. 예를 들어, 달리기나 팀 스포츠를 수행하면서 단순히 속도나 점수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략을 분석하고 경기 중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예측하여 적절한 대응을 설계하는 과정까지 포함된다.


다음으로 Criterion B: Planning and Performance은 학생들이 학습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실천하며 성취를 이루는 과정을 평가한다. 이는 운동 기술의 향상뿐 아니라 개인 기록 개선, 체력 관리, 자세 교정 등 학습자가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능력을 중시한다. 단순히 결과물만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속에서 목표 달성을 위해 전략을 세우고 조절하는 태도와 노력, 자기 주도적 수행을 관찰한다.


세 번째로 Criterion C: Applying and Performing은 학생들이 실제 활동에서 배운 지식과 기술을 어떻게 적용하는지를 평가한다. 경기 규칙을 이해하고 준수하는 것, 전략을 실행에 옮기는 것, 팀과의 협업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단순히 기술을 반복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판단하고 적용할 수 있는 능력과 행동을 중점적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Criterion D: Reflecting and Improving은 학생들이 자신의 수행과 팀 활동을 평가하고, 피드백을 통해 개선점을 찾아내는 능력을 평가한다. 여기에는 자기 자신과 동료의 강점과 약점을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향후 수행 계획을 조정하며 발전시키려는 태도가 포함된다. 단순히 다른 사람의 평가를 수용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사고하고 전략을 수정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한다. 한국식 예의범절과 눈치문화가 가정에부터 체득되어 직접적으로 타인에게 비판의 말을 건네는 걸 어려워했던 아이가 가장 힘들어했던 영역이기도 하다.


이 네 가지 기준을 종합하면, 국제학교 PE 수업의 평가는 단순한 체력이나 운동 기술 중심이 아니라, 지식과 이해, 계획과 수행, 적용 능력, 반성과 개선까지 아우르는 전인적 접근임을 알 수 있다. 학생들은 체육 활동을 통해 자기 자신과 팀을 이해하고, 전략적 사고를 발휘하며, 성장하는 경험을 쌓는다. 이는 결국 점수와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학생들이 체육 활동을 삶의 일부로 즐기고 자기 발전과 협력을 경험하도록 돕는 데 목적이 있다.


출처 : https://www.ibo.org/


이를 테면 달리기의 경우, 누구나 100미터를 15초에 달릴 수는 없지만, 자신의 기록을 개선하기 위한 페이스 조절, 체력 관리, 달리기 자세 교정과 같은 전략적 접근을 통해 자신의 초반 기록보다 더 나은 수행을 보일 수는 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그 성장한 정도를 평가한다. 즉 체육 점수는 절대적인 수행 능력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성장을 얼마나 이루었는지를 측정하는 것이다. 단순히 달리기 속도를 재는 것이 아니라 학기 초 자신의 능력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기반으로 학기 동안 전략을 세우고 점검하며 성장하는 것. 그런 평가 기준에선 아무리 달리기 속도가 느린 아이여도 한 학기 동안 괄목할 만한 '자신만의 성장 그래프'를 보여줬기 때문에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나머지 평가 항목도 체육 능력 그 자체를 재는 것이 아니라 협업과 커뮤니케이션 능력, 리더십과 공감 능력, 규칙 이해와 스포츠 매너를 평가한다. 단순히 공을 몇 개 받았는지, 몇 점을 득점했는지가 아니라 팀 활동에서 다른 학생과 어떻게 협력하는지, 자신의 수행을 스스로 평가하고 팀원에게 피드백을 줄 수 있는지 등 경기 과정에서 배운 것을 다음 활동에 적용할 수 있는지와 같은 과정을 본다. 우리 아이가 또 규칙은 기가 막히게 잘 지켰다. 역시 선비의 나라에서 태어난 아이답게, 느긋하지만 매너 있게.


이 체육 수업의 철학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학창 시절 경험했던 한국의 체육 수업은 대체로 결과 중심이었다. 달리기, 줄넘기, 농구, 배구 등의 수행평가에서 점수는 오로지 결괏값으로 주어졌다. 3점 슛 라인에 서서 농구 골대에 공을 몇 개를 넣었는지, 달리기를 몇 초 안에 들어왔는지. 15초 안으로 들어왔으면 특급, 16초는 1급, 17초는 2급... 20초 바깥은 5급. 급수대로 나뉘는 체력장 등급을 생각하다가 개인 기록 내에서의 성장을 보는 평가 시스템을 보자 마음이 씁쓸해졌다. 나도 어렸을 때 저렇게 평가를 해 주는 체육 선생님이 계셨다면 좋았을 텐데. 결과보다 과정을, 수행보다 노력을 봐주는 평가 시스템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랬던 아이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 보냈던 중학교 1학년 첫 학기. 우리는 다시 기대(?)했던 것만큼 낮은 아이의 체육 성적표를 마주했다.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나와 남편이 예상했던 그 성적표 그대로였다. 예를 들어 탁구 수행평가에서만 아이는 8점 감점을 받았는데, 총 30점 만점에 22점. 탁구공 30개 중 22개를 받아쳤기 때문에 나온 점수라고 했다. 그렇지만 학기 초 아이가 첫 탁구 수업에서 그날 탁구채를 처음 잡아본 아이가 10개밖에 받아치지 못했던 것을 고려하면 22개를 맞받아치는 실력 향상은 매우 큰 성장이었다. 그러나 한국식 점수 체계에서는 그 과정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그냥 30개 중에 22개. 끝.


처음부터 22개를 맞받아쳤던 아이가 학기 말에 그대로 22개를 맞받아친 것과, 10개밖에 받아치지 못했던 아이가 22개로 실력이 향상된 것. 그러나 그 두 케이스의 점수는 동일하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성장했는지, 어떤 전략을 세우고 적용했는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과가 낮게 나오면 아이들은 좌절하고 조금 나아져도 점수에는 큰 변화가 없으니 성취감이나 동기 부여가 생기기 어렵다. 결과만으로 평가하는 단편적 방식은 오히려 아이들이 운동에서 성장과 성취감을 느낄 기회를 제한하고 있었다.




체육 수업의 목표는 단순히 운동 기술을 향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올림픽에 나갈 것도 아니고, 일반 체육 교육의 목표는 엘리트 체육 교육과는 분명 달라야 할 것인데 왜 이렇게 결과만으로 평가하는 단편적 방식을 고수하고 있을까? 왜 체육에서마저 줄을 세울까. 체육 수업의 목표는 아이들이 운동을 통해 활력과 즐거움을 경험하고, 개인적 성장과 팀워크, 소통과 리더십을 배우며, 운동을 자기 것으로 만들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수행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배우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이가 체육 수업에서 얻는 것이 단순한 신체적 기술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협력하며 성장할 수 있는 역량일 때, 이는 결국 삶에서 운동을 즐기고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달리기 기록이 빠르거나 줄넘기 개수가 늘어나는 것보다, 운동을 통해 성취감과 즐거움을 느끼고, 꾸준히 참여하고, 팀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더욱 중요하다.


이런 교육은 단순히 시험 점수로, 기록 측정으로, 수행 평가로 나타날 수 없다. 나는 아이의 체육 성적표를 보며 다시 한번 한국식 체육 교육의 한계를 절감했다. 점수 중심, 결과 중심의 평가방식은 단편적이며 아이들이 운동에서 성장과 즐거움을 느낄 기회를 제한했다. 반대로 IB 교육과정에서 보는 체육은 과정 중심, 성장 중심, 협력과 커뮤니케이션 중심이었다. 아이가 비록 달리기를 빠르게 하지 못하고, 탁구를 완벽히 하지 못해도, 자신의 기록을 개선하고 팀과 협력하며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 자체가 학습이고 성장으로 인정되었다. 같은 학생을 두고 판이하게 갈린 평가 결과. 한쪽에서는 만점, 다른 쪽에서는 감점. 그러나 아이가 꾸준히 체육 활동의 재미를 느끼고, 그 자체에서 동기와 재미를 느끼며 지속할 수 있는 평가 방식은 과연 어느 쪽일까?




우리는 교육에서 아이들에게 정해진 정답을 맞히는 방법을 끊임없이 가르친다. 객관식 문제, 수학 계산, 단어 분석, 요약하기 같은 학습 과제들은 결국 정답을 찾는 훈련이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영역에서 인간은 이미 인공지능과 경쟁할 수 없다. 정해진 답을 찾고 계산하며, 정보를 분석하고 요약하는 일은 기계가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한다. 체육 수업에서도 마찬가지다. 달리기나 특정 운동 기술에서 단순히 수행 속도를 경쟁하는 것은 기계가 인간보다 당연히 우위에 있다. 따라서 우리가 체육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단순한 점수나 속도라면 인간은 결고 기계와 경쟁할 수 없다. 올림픽에 출전할 국가대표가 아닌 이상 기록 경쟁은 체육 수업의 목표가 아니다.


체육 교육의 핵심은 운동 능력 그 자체가 아니라 아이들이 운동을 통해 삶에서 성장하고 협력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IB프로그램의 PE, 즉 Physical Education and Health에서는 그 목표가 다르다. (나는 여기에 방점이 'Health'에 찍혀있다고 생각한다.) 체육 수업은 단순한 기술보다 개인의 건강과 신체 이해에 초점을 맞춘다. 체육 수업을 통해 아이들은 자신의 신체를 이해하고 건강을 관리하며 전략적 사고와 협력 능력을 기른다. 아이들은 점수와 결과 너머의 진정한 성취와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한국 교육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체육을 단순히 기술과 결과로만 평가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몸과 마음을 움직이며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과정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그때서야 비로소 체육 교육은 점수를 위한 하나의 과목이 아니라 삶과 연결된 진정한 학습과 배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에 돌아와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이러한 점수와 결과 중심의 평가 방식이 단순히 체육 수업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한 줄 세우기식 서열화와 순위 경쟁 문화가 교육 현장에 그대로 투영된 결과가 현재의 평가 시스템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과거의 평가 시스템도. 어쩜 내가 학생이던 시절과 평가 시스템이 단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까.) 학생들은 학업과 체육, 예체능 활동에서 끊임없이 점수로 자신과 타임을 비교하며 결과만으로 평가받는 경험을 반복한다. 이는 성취 자체보다 서열과 비교에 가치를 두게 하고 과정에서의 성장과 자기 이해, 협력을 경험할 기회를 제한한다. 아이들은 점수와 등수에 매몰되어 자기 주도적 학습과 내적 동기 부여를 경험하기 어렵고, 체육뿐 아니라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성취감과 자기 효능감을 체감하기 힘들어진다.


점수와 기록으로 줄 세우기를 반복하고, 과정보다 결과만을 강조하는 교육 문화 속에서 아이들은 숨 고르기조차 어렵다. 하지만 나는 한 명의 학부모일 뿐이고, 당장 이 시스템을 바꿀 힘이 없다. 그저 지켜보며 안타까워할 뿐이다. 해외에서 IB 식 교육을 경험한 나로서는 성장과 과정에 초점을 맞춘 평가 방식 속에서 자신감을 얻고 즐거워하던 아이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씁쓸해진다. 같은 아이가 한국식 점수 중심 체육 시간에 움츠러들고, 자신의 작은 성취조차 '나 이번에 수행평가 너무 못했어' 하며 스스로를 평가 절하하는 모습을 보면 이 대비가 더 크게 와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저 아이가 자기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힘을 키워가기를 소심하게 바랄 뿐이다. 점수 이상의 것을 배우며, 스스로를 지탱할 힘을 키워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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