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받는 아이들, 검증받는 부모들
여름방학이 시작되던 날, 아이들이 한 손에 1학기 성적표를 들고 집으로 왔다. 방학의 기쁨으로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보다, 펼쳐진 종이 위에 인쇄된 숫자들에 먼저 시선이 갔다. 다행히 실망이나 걱정보다는 안도의 마음이 먼저 들 만큼 아이들은 매우 양호한— 솔직히 말하자면 꽤 우수한— 성적표를 들고 왔다. 잠시 안심하며 한 학기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에 젖었다.
안도감이라니. 이상한 감정이다. 내 성적표가 아닌데.
아이들이 성적표를 받아올 때마다 엄마는 이상한 기분이 든다. 아이 성적표인데 내 성적표 같은 기분이 든다. ‘애들이 이렇게 열심히 살았어요’라는 의미보다는 ‘제가 이렇게 애들을 잘 키웠어요’라는 성취감이 든다. 처음에는 아이의 성적표를 나의 성취처럼 여기는 이 감정이 부끄러웠다. 그런데 그날 저녁, 인스타그램을 들여다보다가 아이의 올 A 성적표, 각종 수상 인증 사진들이 줄줄이 올라와 있는 지인들의 게시글을 보게 되었다. 사는 곳과 아이들 학교는 달라도 아이들의 학사 일정은 비슷하게 흘러가기 때문에, 한동안 다른 집 아이들의 성적표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아이의 성적표를 나의 성적표처럼 느끼고 받아들이는 게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성취는 곧 부모의 것이라고, 세상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왜 우리는 아이의 성취를 나의 성취처럼 받아들이게 될까.
이 질문에 처음으로 떠올랐던 답은 현재 아이의 성적표가 내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외부 평가'라는 점이었다. 전업주부에게는, 엄마에게는 명시적인 성과 지표가 없다. 일을 잘했다고 칭찬받는 자리도, 프로젝트를 끝냈다고 박수를 받는 회의실도 없다. 식탁을 차려도, 빨래를 개어도, 매일 아이를 등교시키고, 경쟁이 치열한 체험활동을 예약해도 — 아무도 그것을 성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일상의 무수한 일 중 또 다른 ‘당연한 일’로 흘러가 버린다. 이 모든 일은 그냥 '엄마니까' 당연히 하는 일이 된다.
그러나 육아는 반복되는 감정 노동이다. 그 어떤 서비스직과 비교해도 결코 수월하지 않다. 살림은 또 어떤가. 단 하루라도 소홀하면 티가 나기 마련이라 노동의 강도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즉각적인 결과가 없는 돌봄과 살림은 '잘하고 있다'는 평가도, '충분하다'는 기준도 없다. 심지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가치를 판단하는 첫 번째 기준인 '경제적 보상'도 없다. 아이를 낳고 돌보고 가르치는 데 거의 모든 시간을 써 온 나는 전업주부라는 삶의 구조 안에서 '눈에 보이는 성과'라는 걸 거의 잊고 살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의 자아는 확실한 지표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의 성적표는 다르다. 이것은 숫자와 등수, 상장과 성취로 보상받는 세계였으므로. 아이의 성적표는 어느새 나의 정신적 공백을 채워주고 있었다.
아이의 성적표는 한 학기 동안 부모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부모가 아이의 학교 생활을 어떻게 뒷받침했는지 증명하는 문서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아이의 성적표를 두고 '이게 내가 세상에 내놓은 결과'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 성적표에 내가 이끌어온 시간과 노력의 흔적이 담겨 있다고 믿게 되었다. 경기장에서 뛰는 플레이어는 아이였지만 그래도 코치석에 앉아있던 건 나였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의 성적표는 어느 순간 내 성취의 리포트가 되고, 아이의 성적에 매달리는 학부모가 아니었지만 아이의 성적에 기뻐하고 낙담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보상 체계가 거기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득, 내가 학창 시절에 받았던 것과 똑같이 생긴, 4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형식의 성적표를 유심히 쳐다보다가 그게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다.
당연하게도 국제학교에도 성적표는 존재했다. 해외에 살 때도 아이들은 매 학기가 끝날 때마다 성적표를 받아왔다. 그때도 물론 유심히 들여다보긴 했지만 한국에서만큼 꼼꼼하게 살펴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이들이 성적표를 받아오면 나는 잠깐 그것을 들여다보고 어딘가에 넣어두었을 뿐, 인스타그램에 올려 자랑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나의 유일한 성취처럼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성적표에 적혀있는 정보가 너무 부실했다. 국제학교에서 받은 성적표에도 점수가 있긴 했지만 1점에서 7점까지의 단순한 수치였거나, 원하는 수준에 도달했는지 여부를 알려주는 패스와 논패스(P/NP)로 표시되었다. 즉, 그 숫자는 아이가 도달한 성취의 정도를 알려주는 하나의 표식이었을 뿐이었다. 다른 친구들과 비교할 수 있는 평균 점수나 석차 같은 것은 없었다. 평가 항목 옆에 쓰인 숫자와 그 아래 적힌 담당 교사의 코멘트가 전부였다. 그 평가는 담백했고, 과장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를 불안하게 하지 않았다.
국제학교의 평가는 이 아이가 현재 어떤 목표에 얼마나 도달했는지를 알려주는 일종의 과정 평가다. 그래서 아이의 성적표는 아이가 '어디에 도달했는가'를 말해주었을 뿐 남들과 비교해 '어디쯤에 서 있는가'를 가리키지 않았다. 성장은 방향의 문제였지 위치의 문제가 아니니까. 더구나 IB 교육과정은 역량 중심 평가 방식이었기 때문에 수행평가나 시험 등에서 부모가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처럼 좋은 학원이나 과외를 물색해서 아이의 점수를 끌어올릴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그러니 학원도 드물었을뿐더러 내신대비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학부모의 역할은 아이가 학교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익히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아이의 배움은 아이의 삶 안에서 충분히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그걸 지켜보는 사람일 뿐, 점수 하나에 일희일비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아이의 성적표에 적힌 점수는 내 아이의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와 마주한 성적표는 다르다. 지금의 성적표는 철저히 '위치'를 말해준다. 과목마다 만점은 몇 점인지, 우리 아이가 그중 몇 점을 맞았는지, 학급 평균은 얼마인지, 최고점과 최저점은 어느 정도 차이인지… 표 하나에 요약된 숫자들은 단순한 성취가 아니라 위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레 아이의 성적을 내 삶의 성과로 연결지었다. 비교하지 않으려 애쓰는 동시에 비교하고 있었다. 아이가 평균 이상인지, 남들보다 앞서 있는지 뒤처졌는지를 헤아리며 나 자신이 어디쯤 서 있는지도 함께 가늠하게 되었다. 한국의 성적표는 비교를 전제로 설계된 체계 안에 있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남들과 비교하지 말아야지. 나는 그렇게 되새기며 여러 번 마음을 다잡았지만, 성적표는 비교를 내장한 구조였고, 그 구조는 내 의지보다 훨씬 더 강한 힘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아이의 점수를 나의 점수처럼 느끼고 있었다. 내가 전업주부이자 양육자로 살아가는 이 시기, 내 삶의 결과가 수치로 드러나는 유일한 지점이 바로 아이의 성적표였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것은 나에게도 아이에게도 폭력적인 방식이다. 내가 아이의 실패를 내 실패로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아이를 ‘성장하는 존재’가 아닌 ‘검증해야 할 결과물’로 바라보게 된다. 성적이 아닌 아이의 마음을 보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리고 아이는 점점 그런 나를 통해 ‘성적이 좋은 아이만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배우게 된다. 그 결과, 우리 모두는 지쳐버린다.
최근에 <일타맘>이라는 제목의 예능 프로그램을 보았다. ‘일타 강사’가 아니라 ‘일타 엄마’. 프로그램에는 자녀를 명문대에 보낸 엄마들이 등장했다. 아이를 좋은 대학에 ‘보낸’ 엄마들. 그 표현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마치 아이 스스로 대학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엄마가 일일이 계획하고 조정하고 끌고 간 끝에 이루어진 성취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속 엄마들은 자신만의 육아 철학과 교육 전략을 내세우며 말한다. 이 시기에는 어떤 학원을 보내고, 몇 살에는 어떤 습관을 들이고, 어떤 교재를 풀렸는지. 무대 위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듯 설명하는 모습은 다소 낯설고, 때론 숨이 막히기도 했다. 순간 어느 막장드라마에서 한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며 “넌 내 작품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에게는 자랑일 수 있는 그 말이, 나에게는 어떤 섬뜩한 풍경처럼 느껴졌다. 아이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인데, 부모의 성공과 실패, 노력과 욕망의 결과물처럼 말해지는 순간, 아이의 존재는 어디쯤에 놓이게 되는 걸까.
‘작품’이라 불리는 그 아이는, 부모의 손길 아래 조각되고 채색된 끝에 전시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삶은 미술관이 아니고, 아이는 예술품이 아니다. 우리는 아이를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스스로의 존재로, 완전한 생명으로, 우리 앞에 태어났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옆에 서서, 이 작은 존재가 제 길을 찾아가도록 함께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아이를 성취의 수단으로 오해한다. 대학이라는 간판, 점수라는 숫자, 비교라는 잣대 앞에서 흔들리고, 불안해진다. 그 불안은 아이의 미래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실은 부모 자신의 안도감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아이의 성적표를 받아 들고 느낀 '안도감'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성적표는 본래 '배움의 과정에 대한 피드백'이어야 하지만 지금의 성적표는 명백한 서열의 기록이다. 비교를 내장한 구조 속에서 부모는 아이의 성적을 통해 자신의 양육을 검증받고자 하고, 아이는 결과로 증명해야 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아이에게 '결과가 아닌 과정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으려면 부모의 삶 역시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한다. 부모의 시간을, 감정 노동을, 보이지 않는 수고를 '성과' 없이도 존중하는 사회. 평가가 반드시 서열을 의미하지 않고, 비교 없이도 성장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는 믿음이 공유되는 사회. 그런 사회 안에서만 우리는 아이의 성적표를 '나의 성취'로 착각하지 않을 수 있다.
비교 중심의 평가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경쟁’을 전제한다. 아이의 성과는 곧 다른 아이의 상대적 실패로 정의되고, 부모 역시 이 게임의 플레이어로 끌려들어 간다. 학원, 내신, 수행평가, 사교육 시장 전반이 이 구조를 강화한다. 과정보다는 결과, 성장은 지표로 환산되며, 아이는 ‘발달하는 존재’가 아닌 ‘완성되어야 하는 상품’처럼 취급된다. 이런 구조 속에서 부모가 아이의 성적표에 일희일비하지 않기를 바라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요구다.
성적표의 숫자가 부모의 자존감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먼저 이 사회가 ‘부모 됨’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방식을 새롭게 설계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성적표에 적힌 숫자보다 아이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실패를 겪으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진심으로 지켜야 할 것은 아이의 성적이 아니라 아이의 존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