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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 서 있는 청소년들에게

by 주정현

아동기와 청소년기는 성인기를 위한 준비 단계일까?


어쩌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동기와 청소년기의 가장 큰 의미와 목표는 '멋진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이유도, 공부를 하는 이유도, 결국은 ‘사회에 나가서 제대로 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아동기와 청소년기의 의미와 목표는 미래에 있지 않다고.


최근에 리터니 아이들의 한국 학교 교육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는데 얼마 전 한 독자로부터 이런 댓글을 받았다. 상당히 무례한 표현이 많아 몇 차례 언쟁이 오간 후, 종국에는 이 사람의 댓글을 차단해 현재는 게시글에서 볼 수 없지만, 내가 기억하는 요지는 이랬다.


“우리나라처럼 성과 중심의 사회에서는 평가와 성취 위주의 교육이 불가피합니다. 결국 아이들도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을 받는 거니까요. 너무 이상적이시네요.”


이상적이라고? 비꼬는 뉘앙스가 가득했던 그 댓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아, 내가 청소년기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 분과 조금 다를 수 있겠구나. 생각의 첫 프레임부터가 다르구나. 그래서 이런 '생각의 다름'이 생기는구나.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누군가는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비판할 지 몰라도, 나는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성인기를 위한 준비단계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동기와 청소년기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시기’라고 믿는다. 마치 70대의 인생이 80대를 위한 준비 단계로 존재하지 않듯, 10대의 삶도 20대를 위한 예비 과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청소년기는 흔히 인생의 과도기로 여겨진다. 어린이는 아니면서 성인도 아닌. 그런 미완성의 시기.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청소년기는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아름답고, 미완의 상태이기에 더 빛나는 시간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그 시간을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통로’로만 취급한다.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 단계로만 취급한다. 그러다보니 성취와 평가, 학력 중심의 사회 구조 속에서 청소년기의 고유한 의미는 점점 퇴색되어 간다. 아마 내가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동기도 이런 사회적 시선을 바라보는 데에서 생긴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요즘 나는 청소년 상담사 자격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지난달 1차 시험을 보았고, 이번 주 합격통보를 받았고, 내달에 있을 면접시험을 앞두고 있다. 청소년 상담 공부는 또 다른 지평을 내게 열어주고 있다. 성인 상담이나 아동발달 치료와 달리 청소년기 그 자체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필요로 하기에 요즘 청소년학에 대한 여러 전문서적을 살펴 읽어보고 있는데 그 과정을 통해 요즘 절감하는 것은, 청소년기가 얼마나 위태로운 과도기인지에 대한 깨달음이다.


청소년들의 몸은 성인의 몸과 비슷해졌지만, 자아와 신체상(Body Image)은 여전히 아동기의 감정에 머물러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10대 아이들은 흔들린다.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두지 못하고, 주변인의 위치에 서서 자신을 관찰한다.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니고, 그렇다고 아이도 아닌” 애매한 자리에서 방황한다. 그런데 그런 청소년들에게 우리가 “지금의 너는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준비 과정일 뿐이야”라고 말한다면, 그 존재는 얼마나 더 불안해질까?


우리의 인생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있지 않다. 오로지 ‘지금, 여기’에 있다. 지금, 여기. Here and Now. 실존주의 심리치료(existential therapy)와 게슈탈트 치료(gestalt therapy)의 핵심적인 모토(치료 철학)이자 기법이며 최근에는 마음 챙김(Mindfulness) 기반 치료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이 표현은 성인들만을 위한 문장이 아니다. 나를 돌보는 힘은 미래의 계획이나 목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현재를 돌보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경험에 집중하는 것.”


그러나 사회는 우리 아이들에게 정반대의 언어를 가르친다.


“앞으로를 위해 지금을 견뎌야 해.”

“지금의 너는 아직 부족하니까 더 성장해야 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도태돼.”


이런 말들 속에서 아이들은 자신을 ‘현재’로서 존재시키지 못한다.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자책,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 성취하지 못하면 존재 가치가 없다는 불안. 그 모든 것들이 청소년기의 한복판을 짓누른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미래만을 위해 사는 현재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누리지 못한 사람이, 과연 행복한 내일을 만들 수 있을까?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다. 현재가 행복한 사람만이 미래에도 행복하고 싶어 한다. 현재 행복할 줄 알아야 미래에도 행복할 줄 안다. 현재의 삶 속에서 작은 기쁨을 경험한 사람은, 그 행복을 다시 느끼기 위해 내일을 계획한다. 그러나 행복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많은 돈을 벌어도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기 어렵다. 행복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진짜 행복의 본질은 ‘성취’가 아니라 ‘감각’에서 시작된다. 나는 언제 행복한가, 어떤 일을 할 때 몰입을 느끼는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가. 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 방향을 스스로 세울 수 있다. 그리고 그 방향은 세상의 잣대가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경험으로 세운 나침반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여기를 잘 사는 일’은 단순한 현재의 만족이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나는 아이들이 그 사실을 조금 더 일찍 깨닫기를 바란다. 지금의 너희 인생은 다음 시기를 위한 준비 단계가 아니다. 청소년기는 공부를 잘하기 위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어른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지금의 너희는 이미 충분히 하나의 인생을 살고 있다. 지금 웃고, 지금 울고, 지금 사랑하고, 지금 실망하는 그 모든 감정들이 너희 인생의 진짜 일부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현재만 바라보다 보면 도태된다.”

“미래를 준비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처진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한다. 지금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미래의 삶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고. 현재의 행복을 느껴본 사람은, 그 행복을 이어가기 위해 성장한다고. 왜냐하면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경험이니까. 경험된 행복이야말로 사람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청소년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모든 어른들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는 아이들을 너무 먼 미래로 끌고 간다.


“다음에 잘하면 돼.”

“지금은 준비 단계니까 참아야 해.”


하지만 그다음은 과연 언제 올까? 언제쯤이면 아이들이 ‘지금’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혹시 나는 20대에 30대를 준비하며 살고, 30대에는 40대를 준비하며 살지 않았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꽤 그렇게 살았다. 계속해서 다음 단계에 초점을 맞추며 현재를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이들이 나와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를, 우리 아이들은 현재의 삶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길 바란다.


미래의 어느 시점이 아니라, 오늘 이 순간의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기를. 지금 이 시기가 너희 인생의 가장 중요한 한 장면이라는 것을, 그 자체로 아름답고 완전하다는 것을 느끼길 바란다.


청소년기는 결코 어른 되기의 예비 단계가 아니다. 그 시절의 웃음과 눈물, 방황과 혼란은 모두 ‘삶의 완전한 장면’이다. 그 장면을 충분히 살아내는 것이 곧 성장이다. 현재를 살아내는 힘이야말로, 그 어떤 성취보다 단단한 미래를 만든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

너희의 인생은 이미 충분히 빛나고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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