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해서 읽고 나서야 닿은 감정들

정대건의 소설, <급류>를 읽고

by 주정현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라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대건, <급류> 100쪽


최근 정대근의 장편소설, <급류>를 읽었다. 왜 이 소설이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90년대에 출간되었다가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는 양귀자의 소설, <모순>을 생각해 볼 때, 이 소설 역시 지금의 20대 독자들이 선호하는 감성과 어떤 지점에서 공명하고 있는 게 아닐까. 최근 <모순>을 읽으면서 어떤 '감정의 결'이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일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기를 여러 번 시도했지만 완독하지 못하고 중도에 덮어버렸다. 내가 구독 중인 밀리의 서재에 전자책으로도, 오디오북으로도 서비스되고 있었기에 읽을 기회는 충분했는데, 이상하게도 늘 1부까지만 읽고 2부에서 손이 멈췄다. 그렇게 실패한 시도가 무려 세 번. 그러다 자주 가는 도서관에 깔끔한 새 종이책이 최근 입고된 것을 보고 이번엔 '끝까지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빌려왔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완독하고 나서야 왜 내가 계속 2부에서 막혔는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초반부, 그러니까 진평에서 벌어졌던 '그' 트라우마적 사건 이전까지의 이야기는 신기할 정도로 술술 읽힌다. (쓰고 보니 창석과 미영의 죽음은 소설의 가장 첫 문단에 서술된 이야기라 굳이 트라우마적 사건이라고 은유해서 쓸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건 이전까지의 이야기는 문장도 잘 넘어가고 인물의 감정도 따라가기 쉽다. 그러나 진평을 떠난 이후, 성인이 된 도담과 해솔의 이야기에 들어가는 시점부터 소설의 긴장감이 뚝 떨어지는 듯한 인상이 든다. 이야기의 템포도 느려지고, 인물의 감정선은 내 경험 너머의 어떤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말하자면 이후의 전개는 그런 종류의 상처를 실제로 겪어본 사람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폐쇄적인 정서를 갖고 있다. 일반적인 감성의 독자에게는 다소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나는 그 간극을 건너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서 여러 번 책을 놓았던 것 같다. 그런데 묘하게도 초반부를 여러 번 반복해 읽은 덕분인지, 이번에 완독 했을 때에는 그들의 감정선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트라우마적 사건을 계속 반추해 보게 되는 주인공의 심정과, 같은 트라우마적 사건을 계속 반복해서 읽어본 독자의 일치감이랄까. 이해했다기보다는 조심스레 따라가는 정도, 그저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그 경험에 살짝 발을 담가보는 정도였지만, 그게 이번에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게 만든 힘이었던 것 같다.


다만 결말은 솔직히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기대했던 방향은 그런 식의 마무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단순한 해피엔딩을 원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의 비극적 사건이 두 사람의 인연을 규정했다면, 그 끝도 어떤 방식으로든 비극의 형태를 가지고 돌아오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눈물을 펑펑 쏟아내게 하는 닫힌 형태의 결말이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라는 한 사람의, 독자의 욕망이고, 그런 욕망대로 이야기가 흘러갔다면 오히려 너무 손쉬운 비극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소설에서 인물을 죽인다는 선택은 가장 강렬하면서도 가장 간단한 해결 방식이다. 극적 효과는 확실하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하고 쉬운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작가는 그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고통을 안고서도 어떻게든 살아내려 하는 인물들을, 그들의 시간을 따라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 때로 사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어렵다. 죽음의 순간은 한순간이지만, 삶은 수많은 순간이 이어지고 반복된다. 작가는 그 반복되는 고통과 불안을 '버티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 셈이다.


<급류>를 다 읽고 나니, 이 소설은 독자에게 친절한 소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의 진폭도 크고, 인물들이 겪는 고통의 층위도 곱씹어가며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읽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독자에게는 너무 무거운 소설로 다가오겠지만, 또 어떤 독자에게는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감정의 골짜기를 정확히 찌르는 소설로 남을 수도 있겠지. 나에게는 전자에서 후자로 넘어오는 데에 꽤 오랜 시간과 시도가 필요했지만, 결국 '이번에는 끝까지' 도달했다는 사실이 이 이야기의 힘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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