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봄비'
시필사 7일 차. 2026. 3. 16. (월) 박형준, ‘봄비’ -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1994)> 중에서
[봄비]
당신은 사는 것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내게는 그 바닥을 받쳐줄 사랑이 부족했다. 봄비가 내리는데, 당신과 닭백숙을 만들어 먹던 겨울이 생각난다. 나를 위해 닭의 내장 안에 쌀을 넣고 꿰매던 모습. 나의 빈자리 한 땀 한 땀 깁는 당신의 서툰 바느질. 그 겨울 저녁 후후 불어 먹던 실 달린 닭백숙.
이 짧은 시를 필사하면서 머릿속에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중 딱 두 가지만 이 공간에 적어 보려 해요.
1)
일전에 예약 주문했던 도서인 장강명 작가님의 신간, <살면서 한 번은 벽돌책>을 오늘 아침에 받았어요. 책장을 넘기니 책 속에는 저자의 편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그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자기 내면에 존중받을 만한 게 있다고 믿어야 자신을 사랑할 수 있죠.”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오늘 필사한 시가 떠올랐어요. 당신은 사는 것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내게는 그 바닥을 받쳐줄 사랑이 부족했다. 만약 사는 일의 본질이 계속 바닥으로 내려가는 일이라면, 우리가 바닥에 닿았을 때에도 여전히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자기 내면에 존중받을 만한 게 있다고 믿어야 자신을 사랑할 수 있죠. 마치 장강명 작가님의 이 문장이 오늘 시의 답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사실 엄마 자아의 저에게는 나 자신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일보다 더 슬픈 일이 있어요. 바로 자식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는 일입니다. 특히 사춘기 자녀를 키우다 보니 아이의 자존감이 내려가는 모습을 생각했던 것보다 더 수시로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계속 누군가에게 평가당하는 환경에 놓여 있고, 아직 성장 중인 아이들은 당연히 어떤 부분에서는 미숙하므로 자꾸 실수하게 되니까요. 세상이 아이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일 때마다, 아이들이 제 앞에서 이렇게 얘기해요. 난 바보야. 난 대체 왜 이 모양일까. 나 너무 수치스러워.
예전에 어느 강연에서 들은 한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아마 김미경 작가님의 강연이었던 것 같은데요, 아이가 땅을 파고 지하로 내려갈 때 부모는 그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어요. 아이가 내려갈 때, 그 아래에서 받아 줄 사람은 오직 부모 밖에 없다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큰아이가 어느새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학기 초여서 희망 진학 학교를 적어 제출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요, 담임선생님께 관련 서류를 제출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입시를 준비하는 동안 아이는 분명 몇 번쯤 마음의 바닥을 만지게 되겠구나. 아이는 합격과 탈락의 경계에 서기도 할 것이고, 공부를 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마주하는 시간도 지나야 할 거예요.
그래서 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습니다. 아이의 마음이 바닥으로 내려가려 할 때, 저는 아이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 있어야겠다고요. 아이가 땅을 파고 지하로 들어갈 때, 엄마인 나는 지상 빌딩 꼭대기에서 고고하게 내려다보는 부모가 되지 말고 조금 더 낮아지고, 조금 더 겸손해지자고 그렇게 결심했습니다. 아이보다 한참 더 아래, 한 지하 3층쯤에 버티고 누워서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 줄 수 있는 부모가 되고 싶어요.
“너를 보렴. 나보다 훨씬 위에 있잖니. 사실 너는 꽤 높은 곳에 있단다.”
어쩌면 부모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란, 이렇듯 아이에게 선한 착각을 건네주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그런데 왜 하필 닭백숙일까요. 어쩌면 ‘영혼을 위로하는 닭고기 수프’ 같은 의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식이 바닥으로 내려갈 때 괜한 훈수를 두지 말고, 그저 따뜻한 국물 한 그릇을 끓여 주라는 뜻 아닐까요.
그 생각을 하다 보니 제가 자라며 먹었던 수많은 국물 요리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국물 속에는 늘 친정엄마의 손길이 담겨 있었고요.
신혼살림을 시작했을 때가 떠올랐어요. 닭을 손질하고 내장을 만지는 일이 생각보다 꽤 힘들고 불쾌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제야 엄마는 이 어려운 일을 나를 키우는 동안 얼마나 많이, 얼마나 오래 반복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닭의 내장도, 생선의 내장도 엄마의 손을 거치면 말끔하게 정리되었거든요. 그렇게 끓여 낸 밥과 국을 저는 손끝 하나 더럽히지 않고 먹으며 자랐습니다. 엄마가 그 모든 수고를 묵묵히 감내했었다는 건 엄마보다 키가 조금 더 커지고, 결혼을 하고, 내 살림과 내 주방을 가지게 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었어요.
세상에는 “나는 엄마처럼은 아이를 키우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며 어린 시절의 결핍을 자식에게 투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친정엄마처럼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목표입니다. 엄마만큼만 아이들을 잘 키워야지. 그런데 그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아이를 키우다 보면, 엄마가 나를 키우며 해냈던 일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조금씩 알게 됩니다.
역사는 반복되고 삶도 반복되죠. 저는 그 사랑에 기대어 자랐고, 이제는 그 사랑을 담아 아이들에게 닭백숙을 끓여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혹시 언젠가 아이가 마음의 바닥으로 내려가려 하는 날이 온다면, 저는 조용히 그보다 조금 더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고 싶네요.
따뜻한 국물 한 냄비를 끓여 두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