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에피소드
마지막 남은 티백을 우려내며 이 글을 쓴다.
스물여덟 번째 삼베학교 에피소드를 어떻게 써 내려가야 할까 한주 동안 고민이 많았다.
한 두 편 더 기록하고 싶은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삼베학교는 오늘로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마지막 에피소드다.
금소로 가는 610번 버스에 오른다.
버스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 스승님을 찾느라 두리번 거린다. 분홍색 털모자를 쓰고 계셔서 금방 눈에 띈다. 오늘은 스승님 바로 옆자리에 앉는다.
“날이 너무 추워요.”
스승님은 주머니에서 작은 핫팩을 꺼내 손에 쥐어주신다.
따뜻하다. 나는 스승님 주머니 속에서 데워진 핫팩을 손과 얼굴에 대고 언 몸을 녹인다.
금소 정류장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니 맞은편 정류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또 다른 스승님이 보인다. 나는 두 스승님과 함께 등굣길을 걷는다. 첫 등굣길이 떠오른다. 그때는 긴장해서인지 스승님들과 보폭을 맞추려고 일부러 걸음을 느리게 걸었는데 오늘은 자연스럽게 나란히 걷고 있다.
“하- 스승님, 이것 봐요. 입김이 나요.”
“오늘 날이 춥다. 저기 저 사과는 다 얼었다. 쯧쯧...”
서리가 내린 시골마을의 풍경을 크게 둘러본다. 익은 벼는 모두 베어지고 생강밭도 배추밭도 수확이 한창이다. 저 멀리서 탁탁탁 깨 터는 소리가 들리고 산불에 탄 민둥산 아래 울긋불긋한 잎들이 올라와 산이 살아있음을 드러낸다. 나는 지금이기에 느낄 수 있는 풍경들을 온몸으로 느끼려는듯, 몸을 활짝 열고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커피 한잔 마시고 하자.”
삼베학교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커피포트에 물을 받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맥심, 누구는 메밀차, 누구는 카누. 차를 타는 일이 막내의 일만은 아니다. 누구라도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이 커피포트에 물을 받고 취향대로 차를 타서 건넨다.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이 시간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오늘은 스승님이 집에서 싸 온 마 씨를 아침참으로 나눠먹는다.
“마 씨는 태어나서 처음 먹어봐요.”
“밀가루 솔솔 묻혀서 살짝 찌면 맛있다.”
“맛이 꼭 감자 같네요. 달아요.”
“많이 먹어라. 남은 건 싸가고.”
먹고 남는 깨끗한 음식들을 늘 막내의 몫이다. 그래서 하굣길의 내 가방은 항상 음식들로 불룩하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자, 이제 접어봅시더.”
참을 다 먹은 사람이 작업을 부른다.
지난 시간에 삼베 한필을 모두 짰다. 베틀에서 풀어 내 물에 한 번 씻고 바닥에 널어 둔 한 필의 삼베가 바닥을 길게 길게 덮는다.
“잘 말랐다.”
“루화씨, 거 중간을 잡아봐라.”
주름진 삼베를 펴는 작업을 시작한다.
스승님과 나는 서로 마주 보고 발을 맞대고 삼베를 나란히 잡고 같은 힘으로 잡아당겨 주름을 편다. 마치 이불빨래 펴듯이 쫙쫙 잡아당긴다.
“오, 주름이 점점 펴지고 있어요.”
“이러면 자(길이)도 더 늘어나지.”
“아, 그런 효과도 있군요.”
1차로 주름을 편 삼베를 갈지 자로 접어 바닥에 놓는다.
“자, 올라가서 삼베를 발로 밟아라.”
“헉, 발로 밟아요?”
“그래, 올라가 봐라.”
나는 곱게 접어놓은 삼베 위에 수건을 깔고 올라가 발로 꾹꾹 밟는다.
“와, 손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온몸을 다 쓰는 작업이네요.”
“그렇지, 이래 밟아야 삼베가 고와진다.”
”홍두깨 어디 있는 겨“
홍두깨는 굵고 긴 막대다. 이제 홍두깨에 삼베를 감아 3차로 주름을 펴주는 작업을 한다.
“자, 똘똘똘 말아요.”
“양 옆을 나란히 감아야지 한쪽으로 삐뚤면 안 된다. 거 왼쪽을 좀 더 당겨봐라.”
삼베를 잡고 있는 손끝으로 스승님의 단단한 힘이 느껴진다. 그에 비해 내 몸은 안 쓰던 근육에 힘을 주느라 부들부들 떨린다.
홍두깨에 고르게 감긴 삼베를 이제 마지막으로 한번 더 밟으면 정련이 마무리된다.
“벽 쪽에 서서 홍두깨를 발로 굴려가며 밟아야 고르게 펴진다. 자, 이렇게 해봐라.”
나는 홍두깨에 감긴 삼베를 밟고 올라선다.
“악, 발바닥이 너무 아파요.”
“꼭 지압하는 것 같지? 꾹꾹 밟아라.”
그동안의 묵은 피로를 날리듯 발바닥을 고루고루 닿게 하면서 삼베를 꾹꾹 밟는다. 발바닥에 아픔이 점점 가시고 시원해질 때쯤 내려와 홍두깨에서 삼베를 풀어낸다.
뻣뻣하고 주름졌던 삼베가 부드럽고 하늘하늘하게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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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자고 일어나니 손이 퉁퉁 부었다. 따갑고 저릿저릿하다. 삼베학교가 끝나고 긴장이 풀어졌는지 몸에 감기기운이 돈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 요량으로 이불에 누워있다가 배가 고파서 냉장고 문을 연다. 사과, 마 씨, 겉절이 김치가 눈에 들어온다. 냉장고 안엔 전부 선생님들이 싸 준 음식뿐이다.
‘나는 한 해 동안 받기만 했네...’
분화선생님이 준 마 씨,
남순선생님이 몰래 쥐어 준 꼬깃한 돈,
옥연선생님이 키운 사과,
순주선생님이 카톡방에 남긴 힘이 되는 문구들,
동주선생님의 다진 마늘,
점예선생님의 알로에 화분,
선화선생님의 내의,
나래작가님의 꿀고구마,
만숙선생님의 갓 담근 겉절이 김치
...
그리고 글로 나열할 수 없는 수많은 배움들.
감사합니다. 선생님, 스승님.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