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힘들 때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느냐에 따라 내 인생은 달라졌다.
내가 가장 '괜찮아'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사람은 '엄마'였지만 내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로 인해 내 청소년기는 우울했고 의지할 곳이 없어 홀로 내 마음의 우울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았던 게 '사진'이었다. 사진 덕분에 나는 그 어둡고 힘든 시절을 통과해올 수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 나에게 잘하고 있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어른이 늘어갔다. 덕분에 대학생활도, 사회생활도 평균 이상의 존재감을 보이며 점점 자신감을 얻어갔다. 그렇지만 밖에서 얻는 칭찬을 집안에서는 얻을 수 없었다. 여전히 부모의 눈에는 집안일은 일절 돕지 않고 밖에서 뭐하고 다니는지는 모르겠는 그런 큰 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적 충격으로 내가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부모에게 털어놓은 지 오래였다.
사이버대에서 예술심리상담 공부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내 자서전을 써봤다. 그 안에 내가 어디에도 털어놓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써 내려갔다. 모든 원망의 화살은 엄마로 향하고 있었다. 과제로 쓴 글이었지만 제일 믿을만한 학과장님께 내 글을 보여드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드렸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위로받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엄마와의 관계가 개선된 것은 아니었다.
불교공부를 시작하면서 다시금 엄마와의 관계에 대해 직면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스님께 상담을 받기도 했고, 도반들과 나누기를 하면서 내가 '이상적인 부모에 대한 상'이 있다는 걸 알았다. TV에 나오는 화목한 가정의 이미지가 기본이라 생각했고 그렇지 못한 우리 집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지는 않고 있다는 것, 우리 집 정도면 괜찮은? 상태라는 걸 알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엄마를 대하는 건 어려웠다. 모진 말을 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엄마의 태도가 싫었다.
그러다 명상수련을 들어갔다. 첫 4박 5일 명상에서는 엄마에 대한 온갖 원망의 기억들이 봇물처럼 터졌다. 원래 명상할 때는 종이에 기록하면 안 되는데 쉬는 시간이 되면 엄마가 나에게 했던 만행들을 적어내려 갔다. 눈물이 줄줄 났다. 집으로 돌아가면 어렸을 적 기억들을 나열하며 그때 나에게 왜 그랬냐고 따져 물어야지 싶었다. 수련 마지막 날 스님께서는 엄마와 대화를 해보라 하셨다. 막상 집으로 돌아가면서 엄마랑 마주 앉을 생각을 하니 심장이 엄청 떨렸다. 10여 년간 닫혀있던 마음과 입을 열어 내가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내가 다 이야기하면 엄마는 나에게 '미안해'라고 사과할까?... 나는 엄마 앞에 앉아 울면서 모진 말들을 내뱉었고, 나는 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6박 7일 명상에 들어갔다. 아무 소득도 없던 일주일이 끝나갈 때쯤 솔밭에서 명상하다 눈을 떴을 때 내 앞에 있는 거대한 바위가 꼭 우리 엄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소리치고 때려도 꿈쩍 않는 바위 같은 사람. 그게 우리 엄마구나. '우리 엄마는 바위 같은 사람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생각하니 더 이상 엄마에게 바라는 마음이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절 엄마의 나이가 고작해야 30대 중반이었다. 세 아이를 키우며 살림을 꾸려가기에 너무 지치고, 힘든 아이의 마음을 살필 줄 몰랐던, 그리고 본인도 부모로부터 따뜻한 위로를 들어본 적이 없었을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나는 엄마의 사과를 바라지 않게 되었다.
20여 년을 시부모를 모시며 세 아이를 키워낸 여자. 시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똥바지를 빨고 식사를 차려낸 사람. 시집살이를 힘들게 했지만 치매인 시어머니를 용서한 사람. 나는 코로나 2년간 격주 주말마다 본가에 가서 할머니를 돌봐드리면서 엄마의 고생과 삶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의 치매가 점점 심해져 한시라도 곁에 없으면 안 되는 시기가 되자 온 가족이 동의하여 요양원에 모시기로 했다. 그때서야 엄마에게도 자유가 주어졌다. 엄마는 상담 공부, 마음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이미 해탈한 사람이 된 듯했다. 엄마의 표정은 밝아졌고, 자식들을 대하는 태도가 훨씬 여유로워졌다. 나는 덤으로 편안해졌다.
그렇게 엄마로부터 인정받고 싶었는데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남편을 만나고 엄마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조건만 따지면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인격적으로 깊고 그릇이 넓은 사람이라 자신 있게 결혼까지 추진할 수 있었다. 소박한 결혼, 소박한 신혼살림으로 시작했고 엄마에게는 첫째 딸을 그렇게 시집보내는 게 성에 안찼겠지만 내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니 엄마도 나를 부러워했다. 지금은 본가에 가면 나보다 이서방을 더 반가워한다.
글의 제목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라고 쓴 이유는 결국 지금 남편이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풀어가려다 보니 엄마에게 쌓인 이야기를 풀게 되었다. 내가 힘들 때 엄마에게 위로를 받지 못했지만, 지금 나는 옆에 있는 남편에게 내 힘든 마음을 내어놓으면 나는 위로받는다. 최근에 힘든 마음을, 쪼그라든 마음을 말하기 전까지는 너무 힘들었는데 산책을 하면서 슬쩍 이야기하니 남편의 대답은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공감을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해결책이나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해주는 게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 이야기가 '괜찮아'라고 들렸고, 나는 정말 괜찮아졌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내 어려움을 말하는 게 어렵다. 아마 어렸을 적 엄마와의 대화가 단절된 게 오랜 습관으로 남아서 그런 것 같다.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라는 마음이 오랜 시간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있었다. 물론 자립적이고 스스로 해결하는 사람이 멋지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나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기대기도 하고, 나도 또한 도움을 주고 기대 쉴 수 있게 어깨를 내어주면 좀 더 행복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도 이제 누군가에게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