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추억을 환기시키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계절이기도 하고, 어떤 장소가 되기도 한다.
나는 내 오래된 mp3 속 음악 목록을 보고는 그 노래들을 담던 그때로 돌아갔다.
21살,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브라운 아이드 소울’과 같이 소울 가득한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굳이 조용한 노래를 듣는다면 윤종신, 정준일과 같은 잔잔한 멜로디를 선호했다. 그때, 내 취향과는 전혀 다른 그 노래들을 넣은 이유는 짝사랑하던 학교 선배 때문이었다.
당시 여고를 갓 졸업했던 나는 남자들의 작은 친절에도 마음이 요동치는 몽글한 마음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자꾸 친절을 베푸는 학교 선배는 나를 상상력 풍부한 21살로 만들었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누구든 좋아하고 싶던 그 나이의 내가 마음을 주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그 선배가 바로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음악을 좋아했다. 미니홈피 BGM도, 그의 다이어리에도 브아솔을 향한 애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나는 그 가수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mp3에 노래를 가득 담았다. 노래를 대충 듣고는 가장 좋은 노래를 꼽았다. 그 노래의 제목을 외웠다. 다음에 그 선배 앞에서 나 역시 브아솔을 좋아하고 있노라 내색하고 싶어서였다.
나에게 과방은 그가 있으면 열었고 그가 없으면 열었다 닫는 곳이었다. 과방의 문을 열었다. 슬며시 번지는 웃음을 참으며 과방 소파에 앉았다. 어느 여자 후배들에게도 친절하고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웠던 그는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왔다. 나는 mp3를 꺼내 노래 목록을 정리하는 척을 했다.
‘어? 너도 브아솔 좋아해?’
그쪽이 좋아하니까.라는 말만 빼고 내가 준비했던 모든 말을 쏟아냈다. 그는 반색을 하고는 내게 말했다.
‘올해 12월에 콘서트 하는데 그때까지 내가 여자 친구가 없으면 나랑 같이 가자’
나는 공연을 보는 날엔 내가 여자친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나에게 쓰는 단어 하나를 만 개로 조각내 나의 입맛대로 재조립하던 내게 공연을 같이 보러 가자는 말은 더할 나위 없는 확신이었다.
고백만 하면 되겠구나.
한 달, 두 달. 큐피드가 작정하고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겐 여자 친구가 생기지 않았고 어느덧 그와 공연을 보기로 한 전날이 되었다.
내일 고백을 해야 한다는 긴장감에 혼자 커피숍에 앉아 쓴 아메리카노를 홀짝이고 있었다. 공연을 보기 전에 해야 할지, 보고 나서 해야 할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진짜 미안한데... 지금 삼촌이 큰 사고가 나셔서 병원에 가고 있어. 내일 공연 못 보겠다. 미안...’
결론적으로 그 선배는 내게 거짓말을 했다. 공연 보기 전날에 그는 소개팅을 했고, 그 여자가 무척 마음에 들었고, 그리고 그 여자와 공연을 보러 갔다. 그리고 이 사실은 잔인하게도 그로부터 직접 들었다. 삼촌이 다친 건 진짜고 그래서 자신도 공연을 못 볼 줄 알았는데 여차저차... 이 정도의 거짓말은 남겨뒀지만 그게 거짓이고 진실인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 여자 친구도 너한테 많이 미안해하더라. 다음에 맛있는 밥 사준다니까 시간 내라.’
12월, 학교 벤치에서 들었던 그 말은 짝사랑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되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 고쳤던 화장도, 발이 아파도 꼭 신었던 구두도, 혹시 같이 밥을 먹을까 괜히 굶어본 저녁도 다 묶어 저 땅 밑에 묻어버리고 싶었다. 아무도 보지 않게, 특히 이 사람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선배가 못생겨 보이기 시작했다. 왠지 옷 입는 것도 이상하고, 별로 재미도 없는 사람 같았다. 그 선배는 여자 친구와 꽤 오랜 시간 아름답게 교제를 했고, 나 역시 적당히 괜찮은 남자들을 만나고 그러다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면서 나이를 먹어갔다.
6년이 지난 mp3 노래 목록이 아직도 많은 기억을 끄집어낸다. 땅 밑에 묻은 줄만 알았던 기억들인데... 그래도 진짜 묻어버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