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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절에서 맡은 중책은 총무이고, 넓게 보면 관리자 정도인 것 같다. 일주일에 6일을 일하고 월급은 학교에서 받았던 임금의 4배. 하지만 이 좋은 조건을 상쇄시키는 단점은 절에서 숙식을 해야 한다는 것, 집에는 일주일에 한 번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들어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왜 절에 가냐고 물었다. 아빠가 절에서 어떻게 살 거냐고 물었다.
아빠는 ‘너네도 다 집에 없는데 절에서 사나 여기서 사나 똑같다'라고 말했다.
내가 초등학생 때 우리 아빠의 별명은 ‘땡 서방’이었다.
공무원이었던 우리 아빠는 6시 땡 하면 여지없이 퇴근을 했고 정확히 7시쯤이면 우리 집에 도착했다. 그러면 우리 집인 18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춰있을 텐데, 그걸 본 이웃 아주머니들이 ‘땡 서방 퇴근했나 보네’라고 하셨단다.
오빠와 나는 가끔 갖고 싶은 장난감이 생기면 7시 언저리쯤 아파트 입구에서 아빠를 기다렸다. 멀리서 아빠 차가 보이면 우리는 손을 머리 위로 크게 흔들며 아빠 차를 불러 세웠다. 유리창 안에서 아빠는 알겠다는 눈짓하며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왔다. 우리는 양 옆에서 아빠 손을 잡고 문방구를 갔다. 장난감 상자 하나씩을 고르면 아빠는 쭈글 한 갈색 지갑에서 돈을 꺼내 결제했다. 이후에는 슈퍼에 들러 먹고싶은 과자를 잔뜩 샀다. 우리는 우리 과자를, 아빠는 엄마가 좋아하는 과자를 골랐다. 아빠 손에는 과자 봉지, 우리 손에는 장난감 상자. 그렇게 모두의 손을 가득 채워서 된장 냄새 풍기는 우리 집 문을 열었다.
당시에는 핸드폰이 없었던 터라 아빠가 다른 일이 생겨 퇴근이 늦으면 가끔 허탕을 치기도 했다. 그래도 10번 중에 9번은 아빠의 차를 불러 세울 수 있었다. 딱 7시 즈음.
그렇게 매번 같은 시간에 아빠와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게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 시간이 다 지나고 나서야 그때가 행복했던 시절임을 알게 됐다.
그런데 아빠는 그 당시를 가장 행복하다 여겼고 지금도 가장 행복한 순간이 그때라고 했다. 퇴근하고 돌아오는 길에 저 멀리서 두 어린 자식들이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으면 하루 모든 피로가 다 녹았다고. 가끔 우리가 없으면 몇 번이나 두리번거리다가 내심 아쉬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기도 했단다.
지금의 아빠는 ‘땡’하면 퇴근할 곳도 없고, 아파트 입구에서 손을 흔들 어린 자식도 없다. 오빠는 작은 아이의 아빠가 되어있고, 딸은 서울에 있다.
그 모든 적적함을 감내하며 살기엔 여전히 '집'이란 곳이 아빠를 더 우울하게 만든 건 아닐까. 어중간한 외로움이 아니라 차라리 거대한 외로움 속에 푹 빠져버리는 게 아빠에겐 체념하기 쉬운 상황이 될 것 같다. 아빠는 그 곳에서 ‘아빠’라는 이름의 무게를 덜어내고 올 것이다.
여전히 아빠가 절에서 일하는 게 싫지만 1년 정도만 아빠의 책임감이 없는 삶에 익숙해져서 돌아왔으면 좋겠다.
땡 서방, 아빠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