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고백

by 밀크티


어릴 땐 ‘사랑’을 굉장히 가볍게 생각했다. 사랑이란 감정에 나 스스로가 소모되고 싶지 않았다. 단지 내 삶이 무료할 때 소소한 행복을 주는 거라 믿어서 연애가 조금만 심각해지면 너무도 간단하게 이별을 말하곤 했다.


그런 미성숙한 내게 두 번의 고백을 한 친구가 있다.


당시 그 친구는 내게 ‘가장 친한 남자 사람 친구’였다. 남자에게는 유난히 쑥스러움이 많던 내게 먼저 살갑게 다가와주고 먼저 자주 연락해주는 고마운 ‘남자 사람 친구’, A였다.


A에게는 친한 여자 친구가 참 많았다. A는 내 친한 친구와 사귀기도 했고, 내 친한 친구의 친한 친구의 친한 친구와 오래 만났다는 이야기도 건너 건너 알게 됐다.


그래서 A는 내게 ‘친구’ 이상이 될 수 없는 존재라고 선을 그어왔다.


A에게 조금만 설레어도 절대 그 감정에 파고들지 않으려 애썼다. 누구라도 설렜을 행동을 A가 한 것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확실히 친구와 더 가까운 사이. 그 중간에 내 마음이 있었던 건 분명했다. 자기 전 A에게 오는 문자는 항상 반가웠다. 용건이 없는 문자일수록 더 그랬다. ‘뭐해?’ 같은.


한 번은 새벽에 악몽을 꾸고 깨어나 무작정 A에게 연락을 하기도 했다. 무서울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친구였다.


한 번은 A가 친구 공연을 함께 보러 가자고 했다. 별생각 없이 알겠다고 답하고는 당일엔 갑자기 많은 게 신경 쓰였다. 치마를 입었다가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시 바지로 갈아입고, 몇 시간 동안 고데기를 했는데 너무 신경 쓴 느낌이라 머리를 질끈 묶어버렸다. 찰랑이는 귀걸이도 예뻐 보이려는 것 같아 딱 붙는 귀걸이로 바꿔 꼈다. 평소 같은 모습이나 평소보다 3배는 정성을 들인 모습으로 A와 함께 공연을 봤다.


공연이 끝난 후 A는 무대에 올랐던 친구를 찾아가 꽃을 건넸다. 나는 겸연쩍은 듯 조금 떨어진 옆에 서있었다. 나를 곁눈질하며 '혹시 옆은?'라고 웃으며 묻는 친구에게 ‘그러고 싶은데 쉽지 않네’라고 A가 말했다.


그 이후로 나는 자꾸 A와의 관계를 고민하게 됐다. 소개팅이 들어와도 왠지 하면 안 될 것 같고, 남자를 만나도 A에게는 비밀로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묘한 관계가 이어졌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 A는 ‘그러고 싶은데 쉽지 않네’와 같은 과감한 시그널을 내게 보내지 않았다. 나는 어느샌가 ‘그 말이 농담이었구나’하며 쉽게 생각해버렸다. 조금 아쉽기도 했으나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


그렇게 방학이 됐다. 당시 나는 취직한 친구가 있는 서울로 놀러 갔다가 친구의 남자 친구의 친구에게 ‘푹’ 빠진 터. 부산에 와서도 그 오빠와 한참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데 A의 연락이 왔다.


A는 내게 ‘집 앞이니까 나와줄 수 있냐’고 말했다. 그 오빠에 대한 설렘이 A에 대한 고민을 다 날려버린 상태였다.


집 앞에서 A는 내게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은 척 크게 웃었다. 내가 고민하는 모습이 친구를 더 부끄럽게 만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말해줄까?’라고 했더니 A는 ‘아니 나중에 문자로’라고 말했다.


거절을 하고도 나는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동안은 조금 어색하겠지만 다시 서로의 연애사를 나누며 밥을 먹을 사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A는 아니었나 보다. 나와 친구를 맺었던 SNS를 모두 끊었다. 그런 A의 태도에 나는 선뜻 연락하지 못했다. A 역시 먼저 연락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남이 되자니 문제는 우리가 같은 학교, 같은 건물을 쓴다는 것이었다.


개강을 하고는 자꾸 A와 마주쳤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A를 보고 얼른 뒤돌아 뒷문으로 내달렸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얼른 고개를 숙였다. 반갑게 인사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혹시나 싶은 그 정도의 거절도 무서워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2개월 정도를 노력했는데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는 순간과 마주쳤다.


도서관에서 엎드려 자다가 고개를 든 내 앞에 바로 A가 앉아있는 것이었다. 당황하던 A의 모습을 판단하건대 절대 고의는 아니었다.


짐을 바로 싸서 나가기도, 그 자리에 있기도 민망한 시간이 흘렀다. 역시나 A는 그 답게 '왜 연락 안했냐’는 센스 있는 쪽지로 관계의 포문을 열었다.


우리는 다시 같이 밥을 먹는 사이가 됐다. 가끔 시험 이야기, 오늘의 일과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늦은 밤 캠퍼스 길을 아쉽게 천천히 걸었다.


시험을 끝내고 다시 방학을 맞이했고, A는 또 내게 전화를 걸어 고백을 했다. A와 나에게 두 번째 방학, 두 번째 고백이었다.


타이밍도 참. 그 날은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울고 불던 날이었다. 그런데 A는 다 괜찮으니 생각을 잘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참 고마운 마음이었다.


나는 A에게 내일 만나자고 말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설레는 감정은 없지만 A는 편안하고 즐거운 남자였고, 이 감정이 사랑이 될 거라 확신은 없었지만 오답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우리는 그날 작은 맥주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어떻게 말을 시작할지 나도 A도 모르는 모양새였다. 나는 많이 떨려하는 A의 모습이 봤다. 그 모습에 많은 미안함이 느껴졌다. ‘내가 뭐라고’ 그 순간 결정했던 것 같다. 지금 느끼는 외로움과 고마움에 취해서 A와 만남을 시작했다가 혹시 결정을 번복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나는 또 이 A에게 미안한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거절하는 게 나중을 생각하면 훨씬 덜 미안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두 번째 고백을 다시 거절했다.


물론 그 두 번의 고백을 거절하면서 우리 사이는 아주 멀어졌다. 지금은 일 년에 한 번 보낼 안부 문자도 몇 번을 고민하게 만드는 사이가 됐다. 그래도 연락 정도는 할 수 있는 사이라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지금 봐도 참 친하게 지내고 싶은 멋진 친구다.


가끔 그 두 번의 고백을, 아니 종종 그 친구와 그 고백들을 생각한다. 그 고백 뒤로 많은 시간 동안 사랑을 해오며 성숙해진 내가 그때로 돌아가 다시 A의 마음과 만난다면 어떤 결정을 할지 생각해보곤 한다. 어떤 날은 받아줘야지 하고, 어떤 날은 그래도 거절했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나는 두 번의 고백에 대해 정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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