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함이 찾아왔다.
그날은 비가 많이 왔다. 무척 기다리던 날이었는데 말이다. 예약을 취소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고 어쩌면 주최 측에서 일정 변경을 할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됩니다."
'이 날씨에 한다고? 올레 길을 5시간이나 걸어야 하는데?'
매년 가을에 열리는 '제주 올레 걷기 축제'에 참가한 날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인 막내가 걱정이었고 점심 식사를 포함한 참가비도 이미 보낸 뒤였다.
'5시간 비를 맞고 괜찮을까? 어쩌면 중간에 비가 그칠지도 모르잖아!'
막연한 기대를 품고 예정대로 축제에 참가하기로 했다. 출발부터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에 우린 같은 우비를 입은 무리에 끼어 걷기 시작했다. 비는 그칠 것 같지 않았고 중간중간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다 말다를 반복했다.
'어차피 다 젖었는데 뭐!'
젖지 않으려 애쓸 필요가 사라지자 묘한 해방감이 찾아왔다. 몇백 명의 사람이 비를 맞으며 묵묵히 걷는 모습은 수행자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나 역시 시작한 이상 막내를 응원하며 걸을 뿐이었다. 지나치는 참가자들이 모두 어린 막내를 응원해 줬다. 서로 하이파이브를 하고 간식을 나누며 멀어지다 다시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웃으며 스쳐가는 ‘관계’의 가벼움이 좋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길에서 세계가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
내가 알던 ‘관계'를 떠올렸다. 허술한 울타리 안에서 '없는 아이'로 살도록 강요받던 어린 시절은 오랫동안 내 색깔을 알 수 없게 했고 끝내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복잡한 미로 같았다. 평범치 않은 이력을 털어놨을 때 '약점'이 될 수 있단 걸 알아챈 뒤로 나의 멘토는 늘 신경정신과 의사였다. 이사를 가면 항상 집 가까운 곳에 있는 병원부터 수소문했었다.
"선생님, 좋은 엄마가 되고 싶어요."
"불가능한 일이에요."
단번에 나온 의사 대답에 사망 선고를 받은 것처럼 마음이 녹아내린 적이 있었다.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타인의 이해를 갈구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나를 바로 봐야 했다. 불가능한 나를 인정해야 했다.
'아픈 고리'를 끊고, 더 이상 대물림하지 않으면 돼!’
그 뒤로 나는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관찰하고 평소와 다른 것이 있을 때는 병원을 찾아 상황을 알리고 적절한 처방을 받았다. 상담이든 약이든 상관없었다. 그것은 나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싶지 않은 간절함 때문이었다.
어른이 ‘욱'하고 화를 내는 순간은 잠깐 일지 모르지만 그걸 겪은 아이에게는 평생 남을 기억이 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나에겐 다른 대안이 없었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전문가와의 상담은 중요했다. 친구에게 털어놨을 때처럼 나를 부추기거나 자극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객관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됐다. 나와 비슷한 환경에 놓인 아이나 부모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전문가 상담을 권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내리던 비가 소강상태가 되면 우린 좀 더 부지런히 걸었다. 비가 너무 쏟아질 때는 우비를 더욱 단단히 여미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비에 흠뻑 젖은 아이 둘을 데리고 14.5킬로를 걷자니 무리에서 뒤처졌지만 도착지인 '광 치기 해변'에 결국 도착했다. 완주한 것이다. 우린 서로 얼싸안고 발을 구르며 기뻐했다.
제주에 와서야 느린 내 삶을 그대로 인정하게 됐다. 누군가 내 곁을 지나 저만큼 앞서 간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것 역시 그의 삶이기 때문이었다. 비가 쏟아지면 잠시 비를 피할 것이었고 화창하게 개인 날 조금 더 걸어갈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미로 속에 갇혔던 내 얘기를 가만히 들어 볼 생각이다. 완전히 나쁜 삶은 없었다.
미로를 헤맨 경험 덕에 마음의 길을 알아채는 눈만큼은 더 밝아진 것 같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