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나 홀로 주체적인 사람이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가능하면 성별도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 중성의 이름을 원했다. 뭔가를 감추고 싶은 마음과는 달랐고, 어떤 식으로도 '판단'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더 가까웠다.
그게 무슨 소용일까? 생각 안 해본 것도 아니었다. 근본이 바뀔 수 없는데 부르는 이름 바꾸는 걸로는 어림도 없다며 자조 섞인 말도 했었다. 오히려 현실을 외면하는 비겁한 마음은 아니냐고 스스로 되물었지만, 앞으로 남은 날은 몸과 마음이 좀 더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결국 난 개명 하기로 했지만, 작명소에서 이름을 짓고 싶진 않았다.
'그 사유가 합당하여 개명을 허가한다.'
판결문에 적힌 한 줄이 의례히 쓰이는 말인 줄 알면서도 마음이 흔들렸다. 그간의 마음고생을 알아주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으니, 사람이 얼마나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존재인지 알 만한 일이었다.
작년에 개명 허가를 받았다. 내게 '이름을 바꾼 일'은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무슨 소용인 일'이 아니었다. 더 이상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그것을 지어 준 이를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도 숨이 쉬어질 일이었다.
태어나고 싶지 않아 태어나지 않았던 아이가 있었다. 무생물처럼 떠돌던 아이는 사자에게 물려도 아프지 않고, 모기에 물려도 가렵지 않다.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어느 날 태어난 여자아이를 보게 되었다. 태어난 아이가 개에게 물리자 아이의 엄마가 달려와 깨끗이 씻기고는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반창고를 보자 태어날 결심을 하였다.
<태어난 아이>-사노요코
오늘은 개명하고 두 번째 맞는 생일이었다. 작년 첫 생일 아침처럼 나에게 사노요코 작가의 '태어난 아이'를 읽어줬다. 나는 스스로 이름을 지었고, 스스로 태어날 결심을 한 아이가 되고 싶었다.
두 개의 초가 꽂힌 케이크를 앞에 두고 내 아이들의 축하를 받았다. 나는 상처 같은 건 받은 적도 없는 새 사람처럼 웃었다. 일렁이는 파도 하나 없는 잔잔한 바다를 닮은 마음이 평화롭고 감사한 날이다.
앞으로의 나는 잘 자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