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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Sep 19. 2023

너는 좋은 아이가 아니야.

부모의 메세지

건강하지 못한 관계일수록 양육자가 할 일이 많았다. 왜냐하면 아이가 할 일이나 아이가 가진 결정권까지 모두 양육자가 처리해야 되기 때문이다.


'혹시 무슨 일이 있던 걸까? 하지만 우린 오늘 처음 만났는데?'

내게 아이를 데려온 첫날, 아이 엄마의 웃음기 없이 경직된 표정 때문에 얼핏, 화난 사람처럼 느꼈다.

"아이가 문제가 많아요. 눈치도 없고, 말귀도 잘 못 알아 들어서 학교에서 자주 문제가 생겨요"

초면에 대뜸 자신의 아이를 이토록 부정적으로 소개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더구나 아이가 곁에 앉아 있는데 말이다.

"어머님, 제가 하율이와 먼저 만나보고 상담을 하는 게 낫겠어요!"  

곁에 앉아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아이가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이에 대해 편견부터 갖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이 엄마를 한 시간 뒤에 다시 보기로 하고 하율이라고 소개받은 아이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초등학교 1학년인 하율이는 잘 웃었다. 수업 호응도 좋았고 무엇보다 두 개 받침 있는 한글까지 모두 읽고 쓸 수 있는 흔치 않은 1학년이었다. 다만, 그림책을 읽어줄 때 깊이 빠져들었다가도 순간, 집중이 흩어지는 것이 눈동자에 자주 읽혔다. 소규모 수업은 끊긴 아이의 집중시간을 얼마든지 이어 붙일 수 있으니 문제 될 게 없었다. 다만 하율이가 학교에서 소통에 어려움이 있다는 게 무엇 때문인지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장점이 더 많은 아이인 것도 틀림없었다.


수업이 끝난 뒤 하율이에 대한 긍정적인 내용을 전달했지만, 아이 엄마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아이 때문에 자신이 무척 힘들다는 하소연을 하고 싶어 했다.  


하율이의 수업태도는 첫 시간보다 두 번째가 좋았고 그다음 수업은 더 좋아졌다. 읽어주는 책 내용에 푹 빠져 드는 시간도 길어졌고, 독서 후 활동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심지어 능숙하게 가위질을 하며 나에게 귀여운 농담까지 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나도 아이와의 수업이 힘들지 않고 즐거웠다.


며칠 뒤, 아이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상담 시간 예약 없이 불쑥 전화부터 하곤 지금 내가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인지도 묻지 않고 바로 본론부터 들어가는 일방통행식 화법을 구사했다.

"선생님, 공개 수업을 다녀왔는데 하율이가 친구들에게 관심도 없고 잘 어울리지 못해요. 그걸 보니까 너무 속상해서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했는데, 그리 걱정이 되면 특수반 수업을 병행해 보라는 거예요."

학교는 단체 생활이니 내 수업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었다.

"아, 그랬군요!"

"근데요. 선생님, 하율이가 특수반에 가게 되면 친구들도 그렇고 다른 학부모도 편견을 갖고 볼 것 같아요."


'이건 누구를 위한 염려인거지?'

아이 엄마 말에 진위를 파악하고 있을 즈음 그녀는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선생님, 차라리 장애등급을 받고 특수학교에 보낼까 알아보는 중이거든요?"

"네? 장애등급이요? "

"하율이가 특수학교에선 잘하는 편에 속하지 않을까 싶은데, 선생님 보긴 어떠세요? 근데 장애 등급이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네요."

그 말을 하는 엄마 목소리가 태연해서 더욱 놀랐다. 이쯤 되면 타인과 비교하는 마음은 ‘죄’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겨우 삼켰다.

‘어머니, 정신 차리세요!'

아이가 부모의 기대에
꼭 맞게 성장할 거라고 누가 그랬나.

이제 만 7세 아이의 집중력은 개인차가 있고, 내가 본 하율이가 또래보다 눈 맞춤이 짧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외에 갖고 있는 장점들은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고, 장애등급을 운운하는 게 맞는 걸까 혼란스러웠다. 학교에서 처음부터 잘 적응한다면 좋겠지만 문제가 있다 해도 그 지점부터 도와줄 방법을 생각하면 됐다. 그게 양육자의 역할이다.


인정한다는 것은 이럴 때 중요해진다. 인정하기 불편한 것까지 인정하는 마음이 됐다면 특수학교에서 라도 '최고'가 되기 위해 7세 아이에게 장애 판정을 받게 할 위험한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특수학교가 그런 마음으로 갈 곳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좋은 아이가 아니구나!'

아이들은 느끼고 생각한다. 양육자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아이는 말로 들어서만 알지 않고, 양육자의 표정이나 눈빛, 한숨 같은 작은 소리에서도 느끼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양육자는 아이의 뿌리를 흔든다. 아이가 자신의 땅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게 할 것은 응원과 지지였고, 인정하는 부모의 자세뿐이었다. 부족하고 불편한 부분까지 인정한 부모는 아이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았고, 양육자의 부정적인 메시지를 읽은 아이는 생각한다. 자신은 좋지 않은 아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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