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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Dec 05. 2023

무사히 할머니가 된다면

품 안에 들어올 만큼만!


만약 죽음과 동시에 양말 남김없이 뿅! 하고 사라지면 어떨까? 옛날 만화에서 도술을 부리면 펑! 하고 하얀 연기와 함께 감쪽같이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 수 없다면 지금 갖고 있는 물건을 알뜰히 잘 써보는 수밖에 없다. 지금 가진 물건을 아껴 쓰다 망가지면 같은 종류의 물건은 가능하면  다시 사들이진 않을 계획이다. 바람이 있다면 세탁기와 압력밥솥이나 오븐처럼 활동이 왕성한 물건의 만수무강을 바랄 뿐이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

제주에 와서 짐을 줄인 몇 번의 기회 중 한 번은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크게 낙담했다. 오히려 안 하던 운동도 해야 할 때에 2년 동안 매일 하던 운동마저 그만뒀었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가장 큰 걱정은 내가 죽는데도 갖고 있던 물건은 짐으로 남는다는 거였다. 더구나 난 아직 애들도 어린데, 쌓인 짐에 치여 엄마 잃은 슬픔 같은 건 느낄 새도 없는 남매 모습이 떠올랐다. 아니, 처음엔 슬퍼할지 모르지만, 곧 어지르고 정리도 안 하고 떠난 걸 발견하곤  말하겠지?


"오빠, 엄마가 루테인 영양제를 20 상자나 사놨어! 게다가 유통기한도 한 달 밖에 안 남았고!"

"동생아 그럼, 당분간 밥대신 루테인 영양제를 먹도록 하자!"


죽은 마당에 내 알바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상상은 정신 차리기엔 더없이 좋았다. 되돌아와 같이 치워줄게 아니라면 살면서 부려놓은 물건 처리는 미리 해두기로 했다.


인터넷을 헤매던 시간에 짐 정리를 시작했다. 아낀다고 잘 입지 않던 옷이며 물건을 중고거래에 내놓거나 나누고 버리는 방식으로 처분했다.


그때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미니멀한 삶을 원했지만, 아직 사춘기 아이가 두 명이나 있다 보니 난도 높은 미니멀 라이프 실천까진 현실적 어려움이 많았다.


하필 사춘기들은 이제야 물욕에 눈뜨기 시작했다. 아직 좀 더 새 옷을 갖고 싶어 하는 데다 작아진 옷을 안 사줄 도리가 없는 폭풍 성장기였다. 실제로 며칠 전만 해도 아들은 방바닥에 앉다 내 앞에서 바짓가랑이가 한 뼘이나 터졌다. 그전에 바지 옆선이 조금 터진 걸 두 번이나 야무지게 꿰매줬더니 결국 가랑이가 터진 것이다.


나는 자주 손이 가는 옷을 주로 입고 옷 소비를 하지 않은지 오래됐다. 현재는 미니멀한 옷장 정리의 척도라 할, '양팔을 벌려 갖고 있는 옷이 품 안에 들어올 만큼' 만을 유지하고 있다. 그 외 물건에 대해서도 분류를 명확히 해서 어딨는지 몰라서 못쓰거나 다시 사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무사히 할머니가 된다면!

다만,  책만큼은 가장 끝까지 갖고 있고 싶어서 아직 정리 목록에 두고 있지 않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할머니가 됐을 때를 생각하면 그때도 지금처럼 집에 책이 있으면 좋겠다.


책을 읽을 때

항상 연필부터 들고 시작하기 때문에 내가 반복해 읽은 책에는 밑줄은 물론 읽을 때의 감상이나 자료를 첨부해 둔 메모가 있기도 하다. 제주도에는 정비가 잘 된 작은 도서관이 많고, 읽고 싶은 책을 모두 사 읽을 수 없기도 해서  책을 자주 빌려 읽었다. 하지만 빌려온 책에 밑줄을 칠 수 없으니 읽은 뒤 소장하고 싶은 책은 결국 다시 구입하게 됐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일 마저 쉽지 않은 때도 오겠지.

그럼 그동안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 읽고 싶다. 좀 더 지혜로운 할머니가 돼서 과거의 내가 책에 적어 놓은 메모를 읽으며 '호호호 귀여운 생각을 다했었군!'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은 죽음을 쥐고 태어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손에 쥔 것을 확실히 인정하는가? 아니면 불길한 것으로 여겨 애써 보지 않으려 하는가?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는 언제든 병에 걸릴 수 있고 더불어 아무 때고 어떤 이유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 뒤론 청소를 할 때면 떠난 뒤를 떠올리곤 한다. 그렇다고 매일 죽음을 생각하느라 우울하게 살지 않았다. 오히려 명확하게 인지하므로 지금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일본의 경우도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부모님 집을 미리 정리하고 가족과 이웃에게 물건을 나누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을 언제든 편하게 말할 수 있어야 했다.


큰딸이 제주에 있을 때 우린 '1일 1 죽음 토론'이라 할 만큼 죽음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자주 얘기 했었다. 그 대화가 얼마나 자연스러우냐 하면, 어느 날 아침엔 눈뜨자마자 나눈 첫 대화가 죽는 얘기였다. 그날은 해도 해도 너무 한다며 둘 다 웃고 말았지만 결국 그날이 오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자는 결론만큼은 늘 한 가지였다.


죽은 이는 무력하다. 무엇하나 할 수 없기 때문에 사후 모든 처리는 남겨진 이에게 넘어간다.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죽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내게 소용됐던 물건을 미리 정리해 두는 일이다.


불필요한 물건을 정리해 둬서 남은 가족이 남겨진 물건 때문에 심력을 낭비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이유도 있지만, 정리하는 과정은 사는 동안의 내 정체성을 더 확고히 해줄 거라 믿는다.


할머니 돼지는 도서관에 책을 반납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책을 빌리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은행에 가서 돈을 전부 찾았습니다. 그리고 통장을 해지했습니다. 할머니는 식료품 가게에 가서 외상값을 갚았습니다. 또 전기요금과 과일값, 땔나무 값도 갚았습니다.

그림책- 할머니가 남긴 선물(마거릿 와일드 글/론 브룩스 그림) 중에서-


그림책 <할머니가 남긴 선물>의 할머니 돼지는 임종을 앞두고 책을 반납하고 치러야 할 값을 치러 주변을 정리했다.


‘이토록 정리할게 많은 삶을 두고 가볍게 사라지려면, 사는 동안 정리하지 않고 무슨 다른 방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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