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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Dec 01. 2023

죽은 것이 살아나는 꿈

빵은 다 먹었지만!

하찮은 것이 거듭나는 건 감동이다.

냉장고 야채 칸에 조금씩 남은 자투리 야채가 스튜나 볶음밥 같은 요리가 되거나 양파 몇 개가 뜨끈한 양파수프로 재탄생될 때, 나는 앞으로 살아갈 일이 조금 가볍게 느껴졌다.


며칠 전이었다. 낮에 일하느라 찔끔찔끔 이어 쓰던 글쓰기가 감질나던 참이었다. 나는 글을 쓰겠다며 겁도 없이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어릴 때는 숱하게 밤을 새도 한숨 자면 거뜬했다. 더 이상 그러기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밤새기를 결심하고 밀어붙였다. 그날 쓰던 글은 유난히 넘어지고 엎어지길 반복했었다. 의리를 생각해도 자빠진 글을 그대로 두고 잘 순 없는 일이었다.


약을 먹지 않는다면 어차피 잠은 올 수 없었다. 이미 취침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지 수년이 지났다. 나는 결국 약도 거른 채 그냥 하고 싶은 데로 해버렸다. 그날의 만용이 만든 후유증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처음 두통으로 시작된 수면 부족 상태는 무기력한 몸으로 옮겨오는가 싶더니 곧 마음마저 무겁게 했다. 그다음엔 천길 낭떠러지 같은 우울로 나를 이끌었다. 이럴 땐 글이고 뭐고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다. 결국 어제는 착한 아이처럼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깊은 잠이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떴을 때 나는 완전히 새사람 같았다. 마치 전생을 지나 다시 태어난 것처럼 반짝 눈이 떠졌다. 게다가 집에 좋아하는 빵과 커피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을 땐 이불을 가볍게 걷어치워 거의 낙법 자세로 바닥에 착지할 지경이었다.


올리브 빵을 살짝 굽고 미리 데운 뜨거운 컵에 커피를 준비했다. 그 순간,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었다. 여유롭게 기사 검색을 하던 참에 코끼리 관련 기사를 발견했다.


말레이시아에서 새끼 코끼리가 차에 치자 어른 코끼리 5마리가 쫓아와 자동차를 부쉈다. 그러던 중 다행히 새끼 코끼리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코끼리들은 그제야 행동을 멈추고 돌아갔다는 대목에서 어이없게 가슴이 뻐근한 반가움이 드는 것이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고 심하게 우그러진 차량 사진이 올라있었다. 기특한 코끼리들이 인명사고 없이 겁만 줬다니! 대견하기까지 했다.


코끼리에 감동해 관련 기사를 따라가 보니, 인도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사람이 어린 새끼 코끼리를 죽이고 볏단아래에 숨겨둔 일이 있었다. 얼마 뒤 44마리나 되는 코끼리 떼가 몰려와 마을을 초토화시켰다는 내용이었다.


평소 코끼리는 순하고 사람에게도 친근함의 상징이다. 실제 코끼리의 뇌는 10파운드가 넘는 무게에 고도로 발달된 해마와 뇌에 복잡한 주름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통함과 동정심, 익살스러움과 분노, 역할연기 등 심오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코끼리의 엄니를 뺏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간이 악행을 저질렀던가 생각하면 이 정도도 많이 봐준 거였다. 부디 인간이 초토화되던 마을을 보며 느낀 두려움을 잊고 다시 우매한 짓을 벌이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토론시간에 자기주장하는 아이 목소리에 힘이 실릴 때 무척 반갑다. 차근차근 따지고 다시 반박하고 끝까지 지지 않고 논리를 펼칠 때 심하게 감동했다. 가장 약자인 어린이가 겨우 말을 배우고 글을 읽더니 자신의 생각을 꺼내서 주장까지 하게 되는 일은 신비로운 일이었다.


비인간 동물은 감정 따위 느낄 수 없다던 인간 논리에 코끼리가 정면으로 맞서며 따지고 반박하다 지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 것만 같았다.

'새끼를 잃은 심정은 너희 인간과 하나도 다를 게 없어!'

말 못 하는 코끼리가 온몸으로 주장했다고 생각하니 내가 가르치기라도 한 것인 양 마음까지 뜨거워졌다.


아귀가 맞지 않는 숱한 순간을 견디는 게 삶이라고 했다. 망치고 다시 세운 시간이 모여 결국 오늘이었다. 앞날엔 죽었다고 생각한 화분에서 이듬해 싹이 돋는 것 같은 일을 자주 볼 수 있을까? 온갖 하찮다고 여겨진 것들이 분연히 일어나는 그런 일 말이다.


커피는 식었고 빵은 이미 다 먹어버렸다. 나는 주섬주섬 베란다로 나갔다. 가망 없다며 내가 맘대로 사망선고를 내리고 구석에 포개놓은 화분 두 개를 다독여 물을 듬뿍 주었다. 누가 봐도 변덕맞은 짓을 하며 미안해, 혼잣말하듯 슬쩍 말을 건넨다. 끝까지 내 마음 편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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