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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Mar 20. 2024

두 번째 챕터를 연다는 것

운명, 그런 얘기 말고!

이제 다음 챕터를 펼쳐야 한다. 딸이던 내가 다시 내 딸의 어머니인 이야기 말이다. 운명처럼 대를 잇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근거가 확실했고, 원인과 결과마저 정확해서 차라리 과학에 가까웠다.

작년 가을, 큰딸이 캐나다로 돌아간 뒤 우린 자주 긴 통화를 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딸은 밝은 목소리로 기쁜 소식을 전하거나 때론 잔뜩 풀이 죽은 채 연락했었다. 한 번은 슬픈 목소리로 전화해선 다짜고짜, 괜찮다고 말해달라 했다.


그 사이 딸은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토론토에 있는 형법 전문 로펌에서 연수 기간을 마쳤고, 정식 변호사로 최근 그곳과 계약했다. 하지만 딸은 완벽히 새로운 세계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밀려온 여러 변화 때문에 불안정했다


딸이 자신 삶의 중요한 지점을 통과하고 있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야기를 듣는 것 말곤 아무것도 없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왜, 자식이 부모와 완벽히 다른 인격체이며,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존 재인지 새삼 느꼈다. 부모는 그저 자식 앞에 닥친 폭풍이 지나길 기다리는 존재였다. 그런 점 때문에 지난한 과정 뒤에 자식이 얻은 성과에만 반응하는 사람처럼 오해받을 수 있었다.      


딸의 부탁이 아니라도 내게 괜찮지 않을 일이란 없었고, 만약 너무 힘들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해도 모든 게 괜찮다는 걸 간절히 전하고 싶었다. 딸은 변호사가 되면 대도시에서 얻을 기회를 쫓기보다, 캐나다의 어딘가 작은 마을에서 일하고 싶어 했다.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들 곁에 머물며 자신만이 줄 수 있는 것을 주고 싶어 하는 딸의 바람을 존중했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딸이 목가적인 환경에서 치유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는, 내가 딸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마음 아팠다. 내가 어머니에게 느낀 양가감정처럼 내 딸도 내게 비슷한 감정을 갖는다는 사실을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했다. 이 결정은 냉철한 사고를 통해 발현된 것은 아니었다. 원가족을 벗어나고 싶은 이유는 얼마든지 많았다. 내게 결혼은 그녀를 벗어 난 삶을 살고 싶은 본능적 갈망이 찾아낸 출구였다.


그 당시 나는 가부장적인 환경에 속한 어머니가 딸에게 결핍 없는 사랑을 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사회적 제도의 약자며, 가부장적인 남자에게 종속된 어머니가 딸에게 줄 것은 결국 자신처럼 희생하거나 순응하는 삶일 수밖에 없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각기 처한 상황은 달라도 과거엔 힘없는 어머니가 많았다. 자기편이 돼주지 않는 어머니에게 실망한 딸들은 하루라도 빨리 집을 떠나려 했고, 절대 어머니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 점에서 내 조건은 무척 불리했다. 내게 여성의 모습을 처음 보여준 내 어머니 삶은 어땠나? 외부로는 희생을 강요하는 남자를 떠나지 못하고, 인내함으로 순종적인 여자로 보이길 원했지만, 내부로는 딸이던 나와 자신을 분리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녀가 나를 모질게 때리고 목 조르던 순간마저 그녀는 자신을 훼손한 것인지 모른다.      


딸이 어머니 곁을 떠나는 걸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나 역시 물리적으로 그녀를 떠났을 때도 정신적으로는 벗어나지 못했다. 어딘가 내 몫의 사랑이 있을 거란 믿음도 놓지 못했다. 몹시 결핍됐던 나는, 내가 받고 싶은 것을 타인에게 나눠줬고, 어디서든 누군가의 어머니 역할을 자처했다. 강력히 거부하고 어머니를 떠났지만 결국, 나는 그녀에게 학습된 대로 스스로 희생을 실천하고 있었다.      


첫딸을 낳고서야 내가 아이를 키우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가 떼를 쓰고 울면 아이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허둥대고도 방법을 찾지 못하면 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쓰려했고, 그녀가 내게 한 것처럼 소리치고 아이의 보드라운 엉덩이에 손자국을 남겼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첫딸이 내게 너무나 소중했음에도 그랬다는 사실이었다.

좋은 엄마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비로소 내가 어떻게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다고 단언했는지, 아이를 낳으면 모성애만으로 척척 양육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던 일이 그저 터무니없을 뿐이었다.     


현실은 절박했지만, 이런 일을 두고 의논할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내가 찾은 곳은 정신의학과 병원이었다. 정신적 문제로 병원 진료를 받는 게 무척 터부시되던 때였지만,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내겐 내 생각이나 판단에 대해 가장 객관적으로 자문을 구할 존재가 필요했다. 우선, 그녀처럼 자신이 유리한 방향으로 나를 휘두르는 존재가 아니어야 했고, 반대로 엄마는 네게 좋은 사람이 아니니 연을 끊으라고 종용하는 사람도 안 됐다.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대화는 전문가 하고만 가능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린 뒤, 나는 PTSD 진단을 받았다. 좋은 엄마가 되는 건 나중 문제였다. 아이에게 상처를 덜 내기 위해, 20여 년 동안 이어진 학대로 쪼그라든 내 전두엽을 적극적으로 돌보기 시작했다.      


딸은 누구보다 당당한 여성으로 자신을 절제하고 통제했다. 한 가지 목표를 향해 걸었고, 이미 목표한 곳에 거의 도착했다. 그 발걸음에도 어머니와는 다르게 살고 싶은 딸의 도약이 있었지만, 나는 마구 응원했다. 어머니라는 여성에 갇히지 말고, 너는 앞서가라고 말이다. 그런 딸이 어머니라는 이유로 나를 붙들고 도움을 요청하던 날, 나는 내 지난 대화 방식에 오류를 정확히 알게 됐고, 이젠 다른 말을 해야 한다고 깨달았다.    

 

딸에게 필요한 어머니는 피해자로 살거나 온갖 한을 덮어쓴 모습이 아니었다. 그런 어머니는 앞으로 나가는 딸의 걸음을 늦췄다. 자신의 한을 쏟아내는 어머니는 딸에게 연민과 죄책감,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 같은 허탈함을 느끼게 했다. 딸의 독립에 앞서 어머니의 독립이 필요한 대목이었다.


딸의 세상은 여전히 안전하지 않다. 미래의 딸들에게 필요한 어머니는 피해자의 모습이 아니며, 희생하는 어머니도 아니었다. 같은 여성으로 너를 언제나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불합리한 세상과 함께 싸우고 같이 앞으로 나가는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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