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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Jul 16. 2024

커다란 우물이었어.

내가 제자리로 돌려놓을게

마치 집안에 커다란 우물이 숨어 있던 것 같다. 끝없이 길어 올려진 것은 단순히 물성을 가진 어떤 물체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문제를 직시하라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는데, 지독하게 신랄해서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네가 미룬 일이 스스로 제자리를 찾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아!  외치는 소리가 서늘하게 뇌리에 새겨졌다.

지난 한 달 남짓 내가 비운 물건 개수는 600개에 달했다. 끝까지 내려 놀 계획 없던 책을 비운 것이 물건 개수를 늘린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다만, 그걸로 모든 게 정리됐다면 좋겠지만, 여전히 우물은 마르지 않은 상태다. 책을 비운 일은 결과적으로 나름 큰 수확이었다. 덕분에 나는 내가 아끼는 책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됐다. 그 외엔 교실 운영에 필요한 도서만 남겼다.


오래된 책, 다시 읽을 것 같지 않은 책은 문종으로 분류해 나눔 했다. 언젠가 다시 읽고, 언젠가 한 번은 쓸 거라는 허무한 다짐과 구입 당시 물건의 몸값 때문에 놓지 못한 것 이 많기도 했다. 이제 꼭 쥐었던 손아귀 힘을 풀긴 했지만, 여전히 정리는 진행 중이다.

나는 이번 물건 비우기에 중고 사이트를 적극 활용했는데, 나눔이든 판매든 내보낼 물건이 결정되면, 물건에 붙은 먼지를 털고, 묻은 얼룩을 잘 닦은 뒤 정성껏 포장했다. 기분 좋게 나누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이런 마음은 내게 더 큰 기쁨을 준 게 틀림없지만 한편, 몹시 씁쓸한 모습이기도 했다. 그것은 나는 왜 내 것일 때 더 소중히 가꾸며 살지 못하고, 떠나보낼 때에야 보류된 시간을 메우느라 비지땀을 흘리는가! 하는 점 때문이었다.


매일 한 곳에서 두 곳 정도 구간을 정해 비우며 버릴 것과 나눔 할 것, 판매할 것으로 분류하는 작업을 이어갔다.

작업은 시작이 어려울 뿐, 일단 시작하면 뭔가 알 수 없는 즐거움이 있었다. 새로운 보물 창고를 연 것처럼 설레는 마음이 든다고 할까?


반면, 난제라면 버리긴 아깝고, 갖는다 해도 이젠 소용없는 물건을 마주했을 때였다. 이때  비로소 온갖 청승의 전조가 시작됐으며, 물건이 가진 스토리라인에 살이 붙기 시작하는 것이다.


단, 이과정을 두고 한 두번 이긴 경험을 한 뒤, 나는 좀 더 용감하고 단호한 결론에 도달할 힘을 얻었다. 비우는 일은 자신과의 대화였다. 아니, 그보다 격렬한 토론에 가까웠다.


토론에서 나는 거의 할 말이 없었다. 창고에 고이 모셔뒀던 물건을 꺼냈을 때, 형편없는 내 이상과 현실은 확실히 선을 그었다. 비싼 물건이라며 고이 모셔둔 채 키운 내 환상에 비해, 언제나 끄집어낸 물건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언제 생긴지도 모를 얼룩과 분실된 부품 앞에서 나는 늘 반론 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더욱 부끄러운 것은 정작 그 물건의 사용 방법도 모르는 경우였다. 그러니 비싼 돈을 주고 구입했을 뿐, 그것을 긴요하게 사용했을 리 없었다. 중고마켓에 판매 물품을 올리기 전, 나는 검색을 통해 내 물건의 훌륭한 기능을 알아내고 감탄하기 일쑤였다.


그럼 이제라도 다시 써볼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지만, 여기서 냉정을 잃는다면 결국 그 물건은 다시 창고로 돌아가 한 자리 차지하고 말 것이었다.


내 물건과 물건 사이엔 딱히 일치되는 맥락이 없었는데, 이 점은 나와 물건의 관계를 밝힐 무척 중요한 단서였다. 그것은 여러 취미 생활의 흔적도 아니었고, 그저 먹고살기 위해 이 일에서 저 일로 빠삐 옮겨 다닌 고된 시간의 발자국이었다.

나는 유적지에 남겨진 발자국을 따라가듯 조심히 뒤따랐다. 엎어진 무릎의 먼지를 털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도 말갛게 닦아냈다. 왜 이렇게 미뤄뒀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던 시간의 나를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이제 조금 더 성장한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내게 말했다.

거기 앉아서 좀 쉬라고, 이젠 내가 모두 제자리로 돌려놓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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