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왔다.
더 깊은 곳에 들어 있던 물건을 끄집어 올리고, 바닥에 부려 놓을 때마다 나는 몰라보게 성장했다. 대부분 불안과 착각, 집착과 청승이 콜라보된 결과물이었는데, 그건 흡사 삶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비우고 정리한 일련의 과정은 집착으로 움켜 쥔 것을 과감히 놓게 했다. 하루 17시간 요리하던 시간, 불안 때문에 스스로 머리칼을 자른 기괴한 시간을 오려냈다. 내게 특별한 것이 타인에게도 그럴 거 란 착각엔 오만함이 담겼고, 순진하다 못해 미숙한 내 모습이 여과 없이 투영됐다.
객관적 잣대로 자신의 민낯을 직시하기에 창고를 뒤집어 비우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또 있을까?
지난 내 여정은 비교적 경건하게 진행됐다. 새벽 5시에 기상한 나는 15분쯤 명상을 하고, 곧바로 전날 다하지 못한 정리를 이어갔다. 목장갑을 끼고 고대 유물을 채굴한 역사가처럼 조심스레 그것을 들어 올려 손바닥으로 먼지를 쓱, 쓸어내면, 여지없이 나는 과거의 시간으로 소환 됐다. 그런 방식으로 몇 개의 과거로 정신없이 끌려다니다 보면, 나는 더 이상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 몰입의 경지를 경험했다.
이 같은 반복된 행위는 묵언 수행을 닮았다. 나는 조용히 버릴 수밖에 없는 물건엔 잔인한 선고를 내렸고, 누군가 필요할 법한 물건은 중고마켓에 나눔 하거나 저렴히 팔았다. 그때마다 힘들여 깨끗이 닦고 정성껏 중고 물건을 포장했다. 그 행위에 대해 나는 처음엔 그저 받는 이가 기분 좋게 받길 바란 배려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말이 일부는 맞았고, 한편 사실과 다르단 걸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애도였다. 내가 그 행위 뒤에 숨은 진실을 알아차린 것은 살림의 절반쯤을 비운 뒤였다. 그 행위는 단순히 주고받는 손이 민망하지 않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집착과 불안, 착각, 청승으로 점철된 과거 시간과 작별의 예를 다하고 있는 것이었다.
삶은 성공과 실패 같은 이분법적 정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애당초 그걸 저울질할 기준도 없었다. 종종 우리를 흔드는 그 기준이라 할 것도 결국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었다. 삶에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때때로 우릴 불안으로 밀어 넣지만, 삶의 과정을 풀 열쇠가 각자의 손에 쥐어졌단 사실을 생각하면 기뻤다.
무엇도 완전히 나쁜 건 없었다. 설사, 그랬더라도 숱한 경험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 날들이었다. 아직 시작도 못한 이야기를 하며 통과하려던 긴 출렁다리를 순식간에 건넌 느낌이다. 그 결과, 지금 나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오늘'에 당도했다. 나는 과연 몇 번이나 '오늘'을 살아봤을까?
다시 보관할 물건을 모두 닦고 세탁해 다림질한다. 이불을 빨아 강렬한 태양 아래 두고, 부서질 듯 바삭하게 말려놓았다. 기울어진 캣타워의 나사를 조이고 고양이 털을 천천히 빗긴다.
떨어진 단추를 달고, 식사 빵을 구워 방학이 된 사춘기들 간식을 챙기고 책을 읽다 잠시 낮잠에 드는 일상. 오늘을 살고, 내일도 똑같은 일을 하는, 나는 바로 ‘지금’에 당도한 것이다
비움과 정리를 하며 이 연재를 시작할 때, 이토록 빠른 시간에 '오늘'에 당도할지 몰랐어요. 늘 과거가 아니면 미래에 살던 저는 마침내 이곳, 오늘에 도착했어요.
이곳의 평화를 조금 더 즐긴 후 연재를 이어가겠습니다. 기다리는 분이 계시다면, 곧 애도로 떠나보낸 물건과의 이야기로 돌아올게요. 모두 평안한 여름 보내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