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두기!
시간은 언제나 저대로 흐르지만, 거기엔 내가 없었다. 있다 해도 원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간혹, 비웠다는 생각이 들면 흡족했지만, 그것도 금방 세상 것이 돼 타성에 젖기 일쑤였다. 버렸다 믿던 것도 결국, 내 자만이나 고집에 불과한 것이 되면, 마음이 한없이 작아졌다.
시간을 거스를 순 없더라도, 나를 잠시 멈춰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지난 일주일 동안, 잠시 글쓰기를 멈췄다. 관찰의 의도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지만, 생각과 달리 나는 아들에게 자주 서운하거나 화가 났다. 둘이나 되는 사춘기를 돌보는 건 힘에 부친게 맞았다. 세대차이라 해도 요즘 아이들 태도가 모두 이해되는 것도 아니었다. 자식을 어찌 이기나! 몇 번이나 마음을 되새겨도 힘든 건 힘든 일인데, 양육자며 어른이란 이유로 내 감정은 이대로 눌러 둬도 괜찮은가? 인내심을 총 동원해서 참은 것도 과연 참은 것일까?
필요한 것은 아주 작은 숨구멍이었다. 서로의 모습을 온전히 바라볼 거리가 필요했다. 생각해 보니, 학교밖 청소년인 사춘기와는 지난 11개월 동안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와 늘 뭔가 함께 해야 된다는 부담마저 느꼈다. 그것은 집착이 아니면 나만의 착각은 아닐까? 우린 더 자주 떨어져 각자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을 먹었다고 아이들을 내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아이들에게 각자 할 일 몇 가지를 당부하고 며칠 집을 비우기로 했다. 서로의 공간이 절실했다. 곁에 붙어서 다해주면서 잘했니 못했니 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 길로 멀지 않은 사찰에서 운영하는 템플스테이에 참여했다. 마침 운 좋게 자리가 있었다. 종교와도 상관이 없었고, 비우고 내려놓는 마음을 다듬기엔 더없이 좋은 곳이 분명했다.
며칠은 글도 쓰지 않고, 방에 비치된 불가 서적을 보다 낮잠에 들거나 경내를 산책하며 지냈지만, 두고 온 일이 불쑥 떠오르면 이내 마음에 불안이 드리웠다. 템플스테이 일정표대로 밤 9시면 잠자리에 들고 새벽 5시에 일어나 새벽예불에 참여했다. 삼시 세끼 시간 맞춰 준비된 절밥을 먹다 보니 누가 해준 밥을 먹어 본 게 얼마만인지 가늠도 안 됐다. 그것이 큰 돌봄으로 느껴지자 있지도 않은 친정집에 와 마음껏 응석을 부리는 것 같아 마음이 먹먹해졌다.
이제야 아름다운 새소리, 물소리가 마음으로 들어오고, 경내에 조용히 퍼지는 스님의 독경 소리가 내게도 편하게 내려앉았다. 마침내 오늘은 경내 뜰에 비치된 나무 테이블에 앉아 온갖 나무와 새소리의 응원을 받으며 다시 글 써 볼 힘을 얻는다.
오늘 이 마음이 다시 세상 것이 돼도 괜찮다고, 집으로 돌아갈 마음을 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