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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앞에 멈출 때

함께 살자는 말

by 은수

산책길에 우연히 한 사찰 앞을 지나게 되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와서인지, 사찰 입구에는 형형색색의 연등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평화롭고 경건한 사찰의 풍경 속에서 나는 잠시 발길을 멈추었고,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사찰 담벼락에 걸린 커다란 현수막이었다.


화려한 연등 아래에 걸려 있던 현수막에는 '비둘기에게 절대 먹이를 주지 마세요.'라고 적혀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앞에는 서너 마리의 비둘기가 날지도 않고 바닥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문득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생명을 존중하고 자비를 실천하는 공간이라 여겼던 불교 사찰이 아니던가. 하필 그 담벼락에 생명의 한 종인 비둘기를 경계하고 배척하는 메시지가 붙었단 사실이 어쩐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저 작은 생명은 왜 그토록 확고히 거부당해야 할까.


그날 사찰 앞에서 마주친 비둘기들은, 도시 어디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사찰에서 내건 현수막의 단호한 문구 앞에서 그들은 마치 이방인처럼 보였다. 환영받지도 못하며 떠날 수도 없는 존재. 그 모습이 머릿속을 맴도는 와중에 문득 떠오른 건 -작가 손탠의- 이너 시티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비둘기들이었다.

그 이야기에서 비둘기들은 더 이상 단순한 조류가 아니었다. 쓰레기를 파먹고, 사람들 틈에 섞여 살아가는 그들은 때때로 인간의 죄책감이나 망각, 혹은 무관심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비둘기는 우리가 외면하는 도시의 일부이며, 동시에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의 거울이었다.


나는 사찰 앞 현수막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비둘기들에게 절대 먹이를 주지 마세요'란 저 문장은 실제로 비둘기를 향한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어떤 현실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그 배척의 대상은 타자가 될 수도 있고, 또 언젠가는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불편한 사실 말이다.


우리는 흔히 공존을 말하지만, 그 말은 현실에서 얼마나 실천 가능한가. 자비를 말하는 종교도, 생명의 가치를 강조하는 사회도 때로는 조용히 선을 그으며 우리그들을 나눴다. 공존은 단순히 서로를 해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불편함을 감수하고 낯선 존재를 받아들이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사찰 앞의 현수막은 내게 질문했다. 과연 우리는 공존을 원하는가, 혹시 선택된 공존만을 원하는 건 아닌가. 비둘기는 더럽고, 도시를 어지럽히며, 때로는 병을 옮길 수 있는 존재다. 그렇지만 공존이란 그 불쾌함까지 끌어안는 힘에서 비롯되는 것 아닐까.


나 역시 비둘기를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배척의 명분이 돼야 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자비와 관용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비둘기를 멀리 하면서도 문제라고 느끼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된 불쾌함이기 때문일 것이다. 도시는 인간의 삶을 위해 설계되었고, 그 안에서 불편한 존재들은 자연스럽게 불청객이 된다. 그러나 애초에 인간 중심인 세계에서 진정한 공존이 가당키나 할까. 내가 불편하지 않는 생명만을 선택적으로 포용하는 걸 두고 과연 자비라 할 수 있을까.


앞으로 나는 사찰 앞을 지날 때, 연등의 아름다움보다는 비둘기들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 같다. 그것은 단지 위생 문제나 도시 미관의 문제가 아니었고, 내가 어떤 생명과 더불어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묻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불편함을 외면하지 않는 공존,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온전히 바라볼 용기, 나와 다른 존재를 함부로 배제하지 않겠다는 다짐! 공존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아주 작은 생명 앞에 멈춰 서는 태도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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