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에 있는 막내딸이 보낸 메시지였다.
"엄마, 내 방 책꽂이에 방탄 사진 있죠? 그 아래 종이 있거든요? 그거 엄마 거~ 읽어봐요!"
어버이날을 앞두고 기숙사에 들어간 딸이 미리 써뒀던 편지였는데, 어버이날 혼자 있을 엄마를 위한 나름의 깜짝 이벤트였다.
한 장 빼곡히 적힌 편지의 행간마다 아이의 성장한 발걸음이 바지런히 찍혀있었다.
'엄마의 꿈보다 늘 우리를 먼저 생각했던 엄마에게 미안하고, 또 고마워요. 나도 '엄마'라는 이름 너머에 있는 '조은수'라는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딸이 될게요.'
그날 아침, 아이의 마음이 고마운 나머지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누군가 나를, 내 이름을, 내 존재를 바라봐준다는 것은 이토록 마음을 말랑하게 하는 일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독립하고 난 뒤, 나는 이제 조금 더 '나'로 살고 있다.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글을 쓰고, 내 교실에 오는 아이들을 만나는 변함없는 일상 말이다. 일주일에 한 번만 장을 보고 그날 하루, 요리를 하고 빵이나 피자를 구워 두면,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이런 반복적인 일상은 대체로 평이하며 고요하게 흘렀지만, 유일하게 일상의 정막을 깨는 건 매일 내 교실로 오는 어린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작은 종을 흔들어 내게 계절을 일깨워주거나 모든 게 귀엽고 순수한 세계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벨이 울리고 문을 열면, 아이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환하게 웃었고, 내 손에 자주 선물을 쥐어주었다. 봄에는 꽃잎, 가을에는 도토리, 솔방울과 강아지풀. 맞다, 겨울엔 작은 눈사람을 전해주기도 했지! 어느 날엔, 꼭 쥔 손에서 반쯤 녹은 초콜릿을 내밀기도 했다. 나는 선물을 건네는 아이들 손이 너무 작아서 매번 놀랐다.
며칠 전 문을 열었을 때, 솔이는 교실 문턱을 넘기도 전에 내 손에 네 잎 클로버를 건네주었다. 희망과 믿음 사랑과 행운이 담긴 네 잎 클로버 선물이라니. 나는 클로버를 발견한 솔이가 나를 떠올리고 들뜬 마음으로 교실까지 오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 설렘 가득한 마음이 얼마나 순수하고 귀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솔이와 함께 네 잎 클로버를 어떻게 간직할지 고민했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던 솔이는 자신이 무척 소중한 선물을 했다는 사실에 새삼 감동한 것 같았다. 책장 앞에 서서 궁리 끝에 우리는 제법 두꺼운 ‘그리스 로마신화' 책을 꺼내 펼쳤다.
하필 ,그날 펼쳐진 페이지는 헤르메스의 이야기였다. 신들의 전령이며 길 위의 여행자,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의 수호신으로 알려진 존재. 어쩌면 헤르메스는 솔이의 설렘 가득한 발걸음을 지켜보고 있었을까?
그 맑고 순수한 마음이 먼지 쌓인 신화의 페이지에 닿는 순간, 이 오래된 이야기가 아이의 오늘을 품고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나는 솔이의 순수함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길 바라며, 신화 속 헤르메스의 이야기 사이에, 그 작고 귀한 초록빛을 조심스럽게 눌러놓았다.
누군가의 마음을 진심으로 바라봐주는 일은 인간 누구나 소망하는 선물이었고, 내게도 마음 깊이 스며드는 위로였다. 솔이의 네 잎 클로버나 딸아이의 편지 속 진심은 모두 내게 같은 눈빛을 전해주고 있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동안 아이들이 내게 건네준 작은 선물들 속에는 무엇보다 값진 인정과 사랑이 담겨 있었다는 걸 말이다. 그것은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 조용하지만 분명한 종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