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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용기

알사탕 혹은 진통제

by 은수

사노 요코의 『백만 번 산 고양이』에서, 고양이는 백만 번을 죽고 또 살아났지만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사랑한 적도, 소중한 것을 잃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단 한 번 사랑하고, 그것을 잃고 나서야 처음으로 울었다. 그리고 그 후로 다시는 살아나지 않았다. 그의 진짜 삶은, 그렇게 백만 번의 생존 끝에 찾아왔다.


그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문득, 나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살아내고 버텨낸 날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정말 ‘살았던’ 날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혼자 여행길에 올랐다. 제주에서 김포까지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세 시간 남짓 걸렸다. 물리적으로는 짧은 여행이었지만, 심리적인 거리로 따지면 수십 년의 시간과 맞먹는 길이었다. 연고도, 예정된 만남도 없는 그곳에 도착한 순간, 내 여정의 목적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는 학교와 집 사이를 끝없이 걷기만 하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영영 멈출 수 없는 러닝머신 위에 올라선 것처럼, 학교와 집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 채 그 길을 걷고 또 걷고 있었다. 나는 이제 그만 아이를 멈춰 세워, 데려올 생각이었다.


이제 중년이 된 내가 상상한 초등학교는 어쩐지 작고 초라해야 할 것 같았지만, 실제로 마주한 학교는 증축 공사로 높아진 건물들 덕에 오히려 웅장해 보였다. 세월만큼이나 변한 건 감염병과 어린이 안전을 이유로 [외부인 출입 금지] 팻말을 건 교문이 굳게 닫혀 있단 점이었다. 그럼에도 학교 앞 ‘개미문구’ 상호와 그 앞의 도로는 여전했다. 주변엔 고층의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특히 도로의 폭만큼은 그 시절 그대로였다.


어릴 때는 집으로 가는 길이 너무 짧게 느껴져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갔었다. 하지만 그 길을 아이 걸음으로 매일 오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길은 멀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골목에서 골목으로, 혈관처럼 이어진 길을 따라가던 나는 익숙한 삼거리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것은 짙은 갈색 알루미늄 문틀과 하얀색의 간판까지, 마치 45년 전 건물을 고스란히 옮겨다 놓은 듯한 모습의 ‘영일 약국’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는 2000년부터 의약분업이 시작됐고, 그 무렵 동네 약국 대부분은 사라졌다. 약국들은 병원 근처로 옮겨갔고, 주택가에서 약국을 보기는 어려워졌다. 그런데 병원이 있을 리 없는 주택가 삼거리 코너 그 자리에 영일약국만은 여전히 그대로 있던 것이다.


더구나 약국 안을 기웃거리다 문득 눈에 띈 백발의 여약사. 여든은 훌쩍 넘어 보이는 그녀를 발견한 순간, 어린 시절의 기억이 죽비에 맞은 듯 되살아났다. 그날, 나는 집에서 매를 맞고 문밖으로 쫓겨났고 어린 마음에도 피처럼 물들던 수치심에 몸을 숨기러 뛰어든 곳이 바로 그곳 영일 약국이었다.

그녀는 어린 내게 자신의 가운을 덮어주고, 울고 있는 내 입에 말없이 사탕 하나를 넣어주었다. 목을 타고 넘어가던 사탕의 다디단 맛과 함께 그날의 기억은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히 남았었다.


그 막연한 여행길에 영일약국을 만나고 더구나 그녀까지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한 적 없는 일이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약국 문을 열었다. 세월에 내려앉은 문틀은 반쯤 열리다 바닥에 걸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나는 다시 조심히 문을 당겨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무작정 들어선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다 진통제를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약사님, 혹시 40여 년 전에도 이곳에 계셨던가요?”

그녀는 오물거리는 입으로 말했다.

“그럼 그럼, 난 그보다 훨씬 전부터 그냥 여기서만 늙었어요.”

숱이 적은 백발에 쪽을 지어 조그만 비녀를 꽂고, 짧게 개조한 약사 가운을 입은 그녀는 아이처럼 작은 몸을 조심히 움직여 진통제 상자를 내게 건넸다.


나는 두 손으로 진통제 상자를 받아 들고 말했다.

“저는 그때 이곳에서 초등학교에 다녔어요. 요기 옆집에 살았고요.”

“아휴, 그래요? 반가워요.”

그녀는 마치 오랜 세월 집 앞을 서성이던 아이를 기다린 사람처럼, 눈을 맞춰 웃어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그 애가 나였다고 말해 볼 수 없었고, 그녀를 다시 만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자 울컥 목이 메는 것 같았다.

“그럼 건강하세요.”

나는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 인사는 45년 전, 울던 아이의 입에 넣어준 사탕 한 알에 대한, 너무 늦은 고마움의 인사였다.

“그래요. 고마워요. 조심히 가요.”


나는 그제야 먼 길을 달려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골목을 되돌아 나오며, “여기서만 늙었다”던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그녀 삶에 비하면 내 삶은 마치 백만 번을 죽었다 살아난 고양이 같았다. 한편, 그렇게 버티고 견뎌낸 삶을, 진짜 삶이었다고 말해도 좋을까? 반문하고 있었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보다, 죽어도 좋을 만큼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백만 번을 살고도 사랑을 몰랐던 고양이처럼, 어쩌면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상상했다. 때로 삶은 태어난 뒤에도 아주 늦게 시작되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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