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기억과 상실의 버스

우린 함께 어디로 갈까.

by 은수

요즘 다시 읽고 있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한 구절이 버스 창가에 머문다.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이라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통해 단 하나뿐인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잠재력은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상황을 더는 바꿀 수 없을 때 우리 자신이 변해야 한다. <빅터 프랭클의-죽음의 수용소에서(195P)>


막내가 다니는 학교에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평소처럼 카드를 태그 하려는데 단말기가 꺼져 있었다. 기계 고장인가 싶어 주춤거리는 내게 기사님은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오늘 4월 3일이라 무료입니다."

순간, 뭉클한 전율이 일었다.

그날 하루, 제주 전역을 달리는 버스들이 일제히 단말기를 끄고 승객을 맞이하는 풍경. 그것은 단순한 무료 운행이 아니었다.

78년 전 이 땅에 뿌려진 거대한 핏자국을 잊지 않겠다는 공동체의 결연한 조의(弔意)였다. 나는 비용을 감당하며 무료 운행을 감행한 그 행위가 마치 제주 전체가 스스로 상주가 되어 조객을 맞이하는 거대한 제례(祭禮)처럼 느껴졌다.


제주로 이주한 첫해였다. 나는 작은 마을에서 글짓기 교실을 운영했다.

"선생님, 오늘 우리 집 제사 다요. 이따 우리 집에 오세요."

한 아이가 말하자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손을 들고 외쳤다.

"우리 집에도 오세요. 저희도 제사 지내요."

"저도요."

제삿날이라며 손을 든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됐다. 제삿날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4월의 어느 날에 몰려 있었다.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던 내게 돌아온 답은 4·3 사건이었다. 역사책 속에서나 보던 비극적 사건이 세대를 건너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에 나는 숙연함을 느꼈다.

제주의 4월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버스에서 내려 나는 회의장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에 오른 회의 안건 대부분은 교육부 예산 삭감으로 인한 교육 활동 축소에 대한 것들이었다.

아이들의 설렘이 담겨야 할 수학여행은 일정이 축소 변경됐다. 그뿐 아니라 학년 별 현장 체험학습은 예산 부족과 유류세 인상으로 인해 학생 수송 버스를 예약할 수 없다고 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여파가 아이들의 일상에 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더구나 올해 2학기부터는 다자녀 가정에 제공되던 석식에 대한 무상 급식마저 개인 부담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통보가 이어졌다. 이로써 나는 우리가 얼마나 거대한 공동체로 얽혀 있는지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유류세 인상에도 불구하고 제주 시내버스가 비용을 감당하면서까지 지키고 싶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억'이 아니었을까? 비극적 시련을 감당한 이들을 기억해 달라는 당부 말이다.

기억을 지켜내려는 이들의 버스와, 또 다른 전쟁으로 아이들 일상까지 멈춰버린 버스가 2026년 봄날, 같은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역시 버스비를 받지 않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전쟁으로 기름값이 치솟고, 마침내 아이들의 급식판 마저 가벼워지는, 경제적 수용소 같은 현실이 우리 앞에도 바짝 다가왔다. 그럼에도,

제주는 기어이 무료 버스를 운행하며 4.3의 기억을 예우하길 선택했다. 그것은 고유가와 예산 삭감이라는 현실적 시련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품격 있는 태도였다. 어떤 비극도 우리의 '기억할 자유'와 '품격'까지 앗아갈 수는 없다고 외치고 있었다.


[나를 달래는 기록 #4]

그 버스를 탄 덕분에 나는 내 삶의 해묵은 상처들을 비참함이 아닌, 목격의 힘으로 바꿔보자고 마음먹을 수 있었다. 기억은 ‘당한 일‘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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