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천둥소리가 들려도

이런 리뷰, [사람을 사랑하는 일]

by 은수

출발 신호탄이 터졌다.

스타트 블록에 서있던 선수들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신호탄은 분명 모두가 기다리던 소리였지만, 누군가에게는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결핍이 있는 이들은 종종 겪는 일이라곤 하지만, 나 역시 소리에 놀란 마음을 쓸어내리느라 출발이 한참 늦었다.


앞서 나간 이들을 따라잡긴 애초에 역부족이었다. 숨이 차오르자 가슴에 뻐근한 통증이 일었다. '그만둘까?' 따라 잡히지 않는 뒷모습을 좇아 달리는 건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기도 했다,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이번엔 불안을 몰고 왔다. 하지만 출발이 늦었다는 이유로 달리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신호탄 소리에 놀라는 게 말이 되는 거야? 바보같이. '

자책과 원망에 사로잡힌 순간, 달리던 목적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 뒤로 레인을 벗어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감정 소모가 이어지자 달리기에 집중할 수 없다. 내가 쫓던 뒷모습들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결승선이 있기는 한 걸까? 확신이 생기지 않자 마음엔 허기가 몰려왔다. 늘 이런 식의 반복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혹시, 나는 지금껏 제자리 뛰기를 하던 건가?' 라며 허탈해하고 있었다. 글을 쓰지 않는 시간이 초조하게 흘렀고, 나를 달래 줄 문장들을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채수아 작가님의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그 무렵 읽었다. 좋은 어른이 써 내려간 기록. 살아온 삶으로 증명해 낸 사랑의 서사, 그대로였다.

무엇보다 삶은 '결국, 사랑'이란 사실에 한 치의 의심이나 두려움 없는 그 단호함이 부러워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눈물을 쏟았다. 내가 그토록 보고 싶던 결승선이 거기 있었다.


사실, 처음에 느낀 감정은 막막함이었다. 신호탄 소리 따위에 놀라지 않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안정적으로 앞서 달리던 이의 뒷모습을 본 것 같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나는 이토록 따뜻한 사랑과 헌신의 이야기를 통증으로 느끼는 걸까?'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88편의 이야기를 모두 읽고 났을 때, 나는 후련해지도록 울고 난 뒤였다. 그리고 내가 왜 달리기에 집중하지 못하며 외로움과 불안을 반복해 느꼈는지 그 이유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문제는 단지 늦어진 출발뿐 아니라, 내 시선이 머문 곳에 있었다. 나는 달리는 내내 앞서 달리던 이들의 뒷모습을 좇았다. 타인의 속도를 기준으로 달렸고,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때마다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이 아닌, 내 레인을 따라 달리는 내 발끝에 집중해야 했다. 결핍이 내 출발을 더디게 만들었다면, 왜곡된 태도는 길을 잃게 한 셈이었다.


천둥처럼 나를 놀라게 하던 환경이 문제라고 자주 생각했다. 그로 인해 늦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 불공평한 출발선들을 얼마든지 끌어다 핑계 댈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은 뒤, 나를 주저앉힌 것은 천둥 같은 신호탄이 아니라, 그 소리에 놀란 나를 자책하며, 타인의 뒷모습을 좇던 나의 태도라는 사실을 알았다.


마지막 책장을 덮자, 누군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33번 챕터였다. 그가 내게 물었다.

"너, 왜 우니?"


[나를 달래는 기록 #3]

주워진 환경은 바꿀 수 없지만, 내 발끝을 바라보는 태도는 바꿀 수 있다. 이제 나는 천둥소리에 놀라 멈춰 섰던 나를 다독이며, 다시 내 레인 위에 바로 선다. 앞서간 이들의 등 뒤가 아니라, 지금 내 발바닥에 닿는 트랙의 거친 질감을 믿어보기로 한다.
나는 다시 나를 달래며 하루를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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