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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지현 Sep 01. 2016

대화, 사랑의 전부

'비포 시리즈'에대한 향수, 그리고 현재 진행형

나는 대학생이 되면 제일 하고싶은 일이 바로 유럽 배낭여행이었다. 어릴적 보았던 '베르사유의 장미'의 배경처럼 멋진 곳, 디즈니 만화영화의 왕자와 공주들이 살것같은 곳, '비포 선라이즈'의 에단호크 같은 남자를 만날 수 있는 곳. 어린 나에게 유럽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한창 꿈을 펼칠 대학생때는 돈이 없어 가지 못했고, 취업을 하고나니 또 시간이 없어서 갈 수 없었다. 결국은 일을 그만두고 난 다음에야 꿈꾸던 유럽을 가 볼 수 있었다.

 어쨋든 돈과 시간이 없으면 가기 힘든곳이니, 그곳이 상상처럼 아름답든 그렇지 않든 '꿈'이 될 수밖에 없는 멀고 비싼 곳이었다.

내가 유럽여행을 갔을 때 나는 28살이었다. '비포 선라이즈'의 쥴리델피는 23살이었으니 영화같은 로맨스를 바라기엔 쪼끔 더 현실적인 나이였다. 게다가 나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친구가 있었기에 더더욱 영화같은 로맨스를 바랄 처지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국적인 배경이 주는 황홀함에 취해 하룻밤 로맨스를 꿈꿔보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일뿐. 현실은 너덜너덜해진 신발에 다리도 아프고 가벼워지는 지갑에 머리는 무거워지는?

아 내가 23살때 여행을 갔었으면...현실적인 지갑걱정은 좀 덜했을지도 모르지. 에단호크같은 남자는 그때도 만나지 못했을테지만.

나의 로망의 집합체인 이 영화가 올해 연달아 재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향수에 취해 비포 시리즈를몰아서보았다. 아들과 신랑을 재워놓고 장난감으로 어질어진 거실을 대충 치우고, 캔맥주에 과자를먹으며.

 '비포 선라이즈'의 줄거리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두 주인공이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하루동안의 로맨스를 즐기다가 6개월 후 다시 만나자는 약속만 남기고 헤어진다는 간단한 내용.(줄거리는 간단하지만, 두사람의 주고받는 대화가 흡입력이 있다)

 아, 30대의 나에게는 정녕 판타지가 되어버린 이 영화.

 그런데 잠깐, 나도 저 두 주인공 처럼 끝없는 대화 랠리를 하던적이 있었다. 쓰는 단어라고는 하루에 열개도 안될것같은 이 남편과 전화를 세시간씩 붙들고 통화하던 적이....

9년의 시간이 흘렀고 '비포 선셋'에서 두 주인공은 다시 만난다. 두사람은 30대 초반이다. 제시는 작가로써 어느정도 성공궤도에 올랐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다. 셀린느는 환경단체에서 적성에 맞는 일을 찾고 연애도 꾸준히 하고 있었다. 겉보기에 두사람은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서로가 서로를 간절히 원하고 찾고있었다는 사실을 누가 먼저랄것없이 토해낸다. 제시는 자신의 결혼생활의 불행을 고백하며 이렇게 말한다.

" 난 현신 보다는 사랑이야, 그리고 내 아내도 사랑받으며 살 자격이 충분히 있어"


  결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헌신'의 고귀함에 대해 설교를 듣거나 '그놈이 그놈이다' 같은 체념과 자조가 섞인 전언도 듣게된다.

 제시 역시 책임감만으로 흑백같은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는 채울수없는 사랑의 갈증을 느끼며 셀린느를 원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헌신과 책임감' 예찬론자는 영화 말미에 기타로 노래를 부르며 제시를 유혹하는 셀린느를 보며 가정파탄자라고 욕을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자는 사랑을 표현해 줘야해, 애정풍선에 바람이 빠지면 불어 줘야 하는것처럼' 이라고 말했을때 별로 옹호하고 싶지가 않다.

 연인이나 부부 중 누구 한명이 사랑표현을 구걸해야하고 상대방은 어린아이 사탕주듯이 표현해야 하거나 또는 그 어떤 사랑에 대한 표현도 없이 무감각하게 지속되는 관계가 '그르다'는것은 아니다. 나름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방식은 있으니까.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원래 그런거야, 처음과 같을 순 없어, 라며 받아들이는것은 내스타일이 아니다.

 우리 관계는 시간이 흘러서 설명이 필요없는 '편한관계'야 라고 단정짓는것, 또는 그것이 '설렘'이 가져오는 불편함에 대한 시간의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삶은 단순하면서 가벼워질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진부한' 사랑에 대해서 자조적이거나 회의적인 사람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진부하지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것을 양보하고 싶지않다.


 '공감'한다는것은 어쩌면 매우 어려운 일이다(불가능한 일일지도). 그렇기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I know"라고 맞장구쳐주는것,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눈빛과 제스쳐를 보여주는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적극적이고 '대단한'사랑의 태도라 생각한다.


또 9년의 세월이 흘렀다.

'비포 미드나잇'의 두 주인공은 드디어 결실을 맺었나보다. 귀여운 쌍둥이 딸까지 얻었다.

2013년도에 이영화가 나왔을때, 나는 적지않게 실망을 했다. 너무나도 귀여운 수다를 떨던 두 사람이 서로를 비난하고 탓하며 싸우느라 귀한 데이트 시간을 다 써버린다.(육아를 하다보면 남편과 데이트할 시간이 정말정말 부족하다, 그때는 이것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비포 선라이즈'에서 두사람이 기차에서 처음만났을때 옆자리에서 싸우던 중년부부를 보며 셀린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래된 부부는 서로의 목소리를 참을 수 없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다시 이영화를 봤을 때,'비포 미드나잇'은 멋진 로맨스 영화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 둘은 비록 싸우고 비난하고 욕을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랑하고 대화하고 존중하고 있었다.


"남편과(아내와) 말이 통하지 않아"

현실 결혼생활에서는 마음을 닫고 사는 부부들이 적지않다. 또 서로 건드리면 폭발하게되는 부분은 눈감고 귀닫고 넘어가는게 결혼생활의 지혜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마음을 닫는것'보다는 감정소모전을 펼치더라도 나를 알리고 상대방을 알려하는 마음을 계속 가져가고싶다.



'당신은 지금 나와 있어서 행복한가?'라고

매일 묻고 답하고 싶다.


이 영화의 두 주인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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