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지현 Jul 01. 2017

다섯째 아이

행복한 가족, 가족과 행복.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행복한 가정을 꿈꾼다. 그들은 아이를 양육하면서 느끼는 부모로서의 행복을 꿈꾸고 다른 핵가족들이 자신들의 집으로 모이고 그들의 행복을 한 껏 뽐내기위해 큰 집을 원한다.


그러니까,

전통적이 가족의 형태를 이루고 거기에서 얻는 행복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


그들이 네 번째 아이를 낳기까지는 모든것이 순탄했다. 하지만 벤이라는 다섯째 아이가 태어난 후로 그들의 행복은 산산조각 나게 된다. 벤이라는 아이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난폭한 존재며 모두에게 공포와 위협을 느끼게 한다.


남편인 데이비드는 벤을 포기하길 원했다. 아니 모든 가족들이 그러길 바랬다. 하지만 해리엇은 끝내 벤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 죄로 해리엇은 나머지 가족들에게 죄책감을 종용받고 고립된다.


나는 해리엇이 벤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가 '모성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해리엇도 벤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가족의 불행을 예감했지만 벤을 요양소에서 데려온 이유는 아마도 인간의 본능적인 윤리의식이 아니었을까. 눈앞에서 죽어가는 자식(혹은 그 어떤 사람)을 두고올 부모가 어디있겠는가.


정상적이지 않은, 문명에 속해지지 못하는,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에 대한 비난과 책임은 고스란히 그 사람의 '엄마'라는 존재를 향하게 된다.


사회복지사, 정신과 의사, 교사, 상담사 모두들 벤에대해 이렇게 말한다 '조금 느린것 뿐이에요, 엄마가 옆에서 더욱 잘 보살펴 주세요'


'모성애'는 범죄자, 사회부적응자를 만들어낸 엄마에게 평생의 죄책감과 책임을 짊어지게 만든다.


과연, 전통적인 가족의 역할(특히 부모의 의무나 책임)같은것이 제대로 이 사회를 건강하게하는 뿌리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잘 모른다. '벤'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지, 혹은 '벤'이라는 문명화되지 못하는 사람의 존재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지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벤'과 같은 존재와 어쨋든 공존 할 수 밖에 없다.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꿈꿧던 행복은 표면적으로는 이루어졌다. 그들은 이혼하지 않았고, 큰 집에서 아직 살고 있으며, 벤을 제외한 아이들 넷을 키웠다. 그렇다면 그들이 꿈꾼 행복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해리엇의 엄마인 도로시가 연달아 임신하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모든것을 움켜쥐지 않으면 그것을 놓쳐 버릴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고 있구나'

  가정을 이루는것 자체가 인생의 목표되는것, 전통적인 가치관에 얽메이는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우리는 행복의 요소라고 믿고 있는것들을 움켜쥐려고 안달하지만 결국은 행복 자체가 허상에 불과 할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결혼과 설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