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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세준 Mar 19. 2021

진실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예전에, 상담전문가로 훈련 받으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경고가 하나 있습니다.


 '내담자의 말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fact)'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내담자들이 많은 경우(특히 초기) 지배적인 정서에 사로잡혀 사실 자체를 왜곡하고  사실의 전후 관계를 혼동하기도 하며 자신이 겪은 상황을 지극히 주관적으로 해석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상담을 받는 것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내담자의 말이 곧 사실이 아님을 체득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중립적인 태도로 듣는 훈련'을 받아본 경험이 거의 혹은 아예 없습니다.


특히 상대방의 정서에 공감하면서 동시에 그의 말을 사실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연습하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 때문에 상담수련생들은 슈퍼비전에 '많은' 시간(=돈)을 씁니다.


그만큼 힘든 일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잘 훈련된 상담자는 내담자의 결코 내담자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 않습니다.


대신, 내담자의 말로부터 건조한 사실을 추려내고 그 밑에 깔린 정서와 욕구를 읽고 변화의 의지를 찾아 독려하는 역할에 주력합니다.


상담자가 수용하고 타당화하고 지지하는 것은 내담자의 핵심 욕구와 정서, 그리고 변화의 의지이지 내담자의 사실이 아닙니다.


상담자가 내담자로부터 이끌어내야 하는 것은 바로 '진실 truth'입니다.


그 진실이 내담자를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The truth will set you free.


내담자가 발견하게 될 진실의 공식이 있다면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실 = '명확한' 사실 + '주체적' 해석 + '변화의' 행동


진실을 되찾는 작업은 크게 세 가지 단계로 이뤄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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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기


나의 감정과 욕망으로 채색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먼저 찾아야 합니다 .


이를 순서대로 배열해 놓고 사건의 제 3자가 되어 흐름을 따라가봐야 합니다.


그러면 사실관계가 저절로 드러납니다.


진실의 뼈대가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둘째, 주체적으로 해석하기


내담자의 해석은 오염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부모, 형제, 친구, 애인, 조직 등 온갖 목소리들이 내담자의 마음을 무단점유한 채 중구난방으로 떠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내담자는 자신이 겪은 사건이 과연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그래서 상담자는 내담자를 둘러싼 목소리들의 포위망을 섬세하게 해체하는 작업을 합니다.


방해자들이 제거되면 오히려 사건의 해석은 쉬워집니다.


내담자들은 명확한 사실 관계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빠르게 찾아냅니다.


진실의 살이 채워지는 순간입니다.


셋째, 변화를 주도하는 행동


명확한 사실의 뼈와 주체적인 해석의 살이 더해지면 내담자는 온전해집니다.    


내담자는 비로소 처음으로 자신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힘을 발휘해 직접 문제를 바로잡기 시작합니다.


앞에 나서서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이야기하고 공동체에게 변화를 호소하기 시작합니다 .


이 모든 과정을 '주도적'으로 수행하며 결국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꿔 놓습니다.


나의 회복과 집단의 문제 해결을 분리하지 않고,

각 주체의 변화를 요구하기.

 

우리는 때때로 이를 '정치적political'이라고 부르며 이는 매우 정확하고, 동시에 바람직한 표현입니다.


세상은 항상 앞장 선 개인이 나머지 사람들을 이끌면서 누적한 변화로 조금씩 나아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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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진실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거친 내담자는 더 이상 일련의 증상을 겪는 피해자로 머물지 않습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더 이상의 가해를 차단하며

비슷한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연대하는 ,


'응답자 answerer'가 됩니다.


왜 세상은, 신은, 하늘은, 사회는, 그는 나에게 이런 시련을, 고난을, 괴로움을 주었는가가 아니라,


자신이 겪은 피해와 문제 해결의 과정이 일종의 자문자답 프로세스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나만 왜?라는 질문이,

나를 포함한 우리는 왜?로 바뀌면서

우리는 어떻게?라는 질문에까지 답하게 됩니다.


그렇게 내담자는 세상의 피해자에서 세상의 질문에 응답하는 자로, 문제를 해결하는 자로, 상처의 치유자이자 변화의 촉진자로 거듭납니다.


이 긴 글을 쓴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누군가 명확한 사실을 말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주체적인 해석을 전달하면서

우리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 진실은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고 괴로운 것일 가능성도 매우 높습니다.


최근 몇년 사이 우리 사회의 여성들이 온갖 형태로 폭로한 진실들은 지금 우리를, 세상을 바꾸고 있습니다 .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진실은 또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The truth will set us f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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