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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세준 Mar 24. 2021

자살자에 대한 예의

함부로 말하지 않기

자살자의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어째서 그러한 극단적인, 우발적이면서도 필연적인 선택으로 내몰리는지 1도 모르는 자들이

자살자를 두고 '유죄', '무책임', '비난 받아 마땅한' 등

가당찮은 형용사들을 함부로 붙이고 있다.


평소에 온건하고 합리적인 글을 쓰는 사람들도 

유독 자살자에 대해서, 특히 자살한 정치인에 대해서 냉혹하고 잔인하고 단정적인 글을 쓰는 것을 보고 분노와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낀다. 


인간 내면의 깊이와 그 속에서 층층히 쌓여 있는 트라우마와 내적 갈등들이 산재한 가운데, 그것이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외부의 충격과 결합할 때 나타나는 우발적인 화학 반응에 가까운(고로,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사건. 


나는 자살을 그렇게 본다. 


제발 자살자를, 

그 사람이 설령 당신이 좋아했던 혹은 싫어했던 정치인이라고 할지라도


죄를 지었으니 죽은 것이다(유죄의 단정).

죄를 저지르고 그냥 뒤져버렸으니 무책임한 것이다(자살자의 책임 추궁).

자살로 상황을 모면하려 했으니 비겁하고 비난받아 마땅하다(자살자에 대한 윤리적 비난)


이런 식으로 함부로 대하진 말았으면 한다. 


나는 일부 사람들이 TPO에 맞지 않게 쏟아내는 섣부른 애도 못지 않게


자살자를 두고 벌어지는 온갖 형태의 '차갑고' '전지한omnicient' 관점의 비난을 볼 때마다 뜨겁게 화가 난다. 


그리고 동시에 자살자에 대한 나의 무지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 


내 마음 속에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들이 처한 상황과 , 저지른 행동과,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맥락까지 온갖 것들을 마음 속 상자에 넣고 흔들어 보면... 언제나 결과는 똑같다.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자살자에 대해 섣부른 애도도 추모도 비난도 비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사건은 벌어졌고, 사람은 죽었고, 그로 인한 결과를 살아 있는 우리가 감당하고 있으며 죽은 자는 영원히 말이 없고 우리는 도대체 그가 왜 죽었는지 영원히 알 수 없다. 


심지어 그가 남긴 유서를 읽어도 말이다.  

그저 짐작만을 할 뿐이다.


'함부로 말하지 않기', 

그리고 '남은 자를 위로하기' 

그리고 '자살의 원인을 탐색하고 비극의 재현을 예방하기'

또한, 자살자와 관련된 사람들(유족, 피해자, 혹은 가해자)에 대해서도 도를 넘은 비난과 추궁을 삼가하기.


이 정도가 남은 자들의 최소한의 윤리가 아닐까 싶다. 


평소에 '비교적' 멀쩡하던 사람들이 꼭 자살자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차갑고 잔인하게' 구는 모습을 보자면, 

자살이야말로 인간 사회의 가장 오래된 터부(금기)가 아닌가 싶다.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반쯤은 자살에 대해 아무런 이해도 없이 죽은 자들을 비난했던 과거의 나에게 다시 한 번 그때의 경솔함을 상기시키기 위함이기도 하다.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나에겐 과거 내가 했던 모든 말이 나에게 되돌아왔다. 


그 차갑고 무정하고 서슬푸른 단어들이 말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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