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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킨트 Jun 06. 2024

나무가 되어버린 사람 (2)


    미연은 한참 뒤에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근데 불문과 다니시는…”


    “아, 예. 맞아요.”


    미연은 남자가 들고 있는 파일에 새겨진 학교 로고를 보고는 남자가 그녀와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전 2학년이에요. 그쪽은 4학년이시죠?”


    남자가 말했다. 미연은 그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생각에 의문이 생겼으나 그냥 지나가다 자주 본 모양이겠거니 하고 물음표를 덮어버렸다.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의 학교이니 남자가 자신을 알아보는 일쯤은 당연할 수 있다. 더군다나 궁금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었다. 그런데 잠깐. 버스 안에서 바보 같은 모습을 보았을 텐데. 미연은 낯이 달아올랐다.


    “정말 고맙습니다.”


   미연은 어렵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찾았다.


    “저 근데…”


    “예?”


    묘연한 분위기에 미연은 남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저기... 제가 저녁을 못 먹어서 그러는데 밥 좀 사주시겠어요?”


    그러고 보니 미연도 허기져있다. 지갑을 찾아준 사람이니 그 정도 답례는 하는 게 도리인 것도 같았다.

    두 사람은 작은 식당에 앉아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어색하게나마 몇 마디씩을 주고받았다. 미연은 남자의 이름이 재형이고 국문과 2학년이란 사실을 알았다. 평범한 얼굴이면서도 비교적 좋은 인상이었고, 한편으론 조금 무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뻔뻔함도 묻어있었다. 대화의 말미에 이르러 미연은 이미 오래전에 그가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것과 그의 집 방향과는 정반대의 버스를 타고 있었다는, 두 가지 사실을 눈치챘다.


    정류장에서 미연은 다시 버스를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도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버스는 길의 건너편에서 보면 늘 잘 오는 듯해도 막상 정류장에 서면 감감무소식이다. 하지만 미연의 그러한 단정은 사실이 아니었다. 버스는 늦을 때도 있고 때를 맞춰 나타나기도 한다. 다만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진한 인상을 남겨주기 때문이었다. 기다림은 절실함이기에.


    미연은 차도에서 시선을 돌려 무심코 재형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재형은 무언가 생각하고 있었다. 미연의 시선을 느꼈는지 재형의 고개는 미연에게로 돌려졌다. 미연은 잠시였지만 재형의 눈빛을 보았다. 낮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우리 사귀는 거 어때요? 제가 전부터 좋아했어요.”


    떨리는 목소리는 진심을 담는다.


   “미안하지만, 난 지금 사귀는 사람이 있어요.”


   미연은 연인인 선욱을 떠올리며 자신의 말을 든든한 방패감으로 여겼다. 게다가 미연은 자신이 이 남자보다 두 학년이나 위고, 재수까지 해서 아마 적어도 세 살 정도는 더 많음을 잘 알고 있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미연의 방패에 살짝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아니… 분명 그건…”


    “글쎄,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니까요.”


    미연과 재형, 두 사람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죄책감은 미연을 잡아두고 있었다.

    미연은 세 번째 데이트에서 재형을 앞에 두고 선욱을 떠올렸다.


    “왜 음식이 맛이 없어요?”


    “아니야. 그런 거.”




    그날 밤, 우연처럼 미연의 전화가 밤을 울렸다. 재형인 줄 알고 급히 전화를 든 미연은 수화기 저 너머의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 한 때는 얼마나 듣고 싶어 했던 목소리였던가. 선욱이었다.


     “계속 안 보이던데… 요즘 잘 지내?”


    “그냥 좀 바쁘게 지냈어.”


    “하긴 4학년이니까.”


    “그래…”


    미연의 목소리는 자꾸만 작아지고 흐려졌다.


    “근처에 있어. 잠깐 나올래?”


    미연과 선욱은 오래된 과 커플이었다. 선욱은 3학년을 마치자 군입대 지원서를 냈다. 입대일이 기다리는 동안 선욱은 남들과 달리 더 바빴다. 아버지의 사업을 돕는다며 직접 공장에 나가 일손을 거드느라 둘은 만날 짬을 내기가 오히려 더 힘들었다. 밤늦은 시각이면 둘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자연스럽게 만남의 횟수도 줄어만 갔다. 그렇게 조금씩 사이는 멀어져 갔다. 둘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둘은 서로의 고단함이 가져오는 피로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 경구처럼 보이지 않자 마음은 조금씩 닫혀갔다.


    어둠 속에 선욱은 벤치에 앉아있다. 미연의 기척을 들었을 법한데도 그는 여전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밤하늘을 응시하는 눈빛엔 흔들림이 없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달을 본 건 처음인 것 같아.”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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