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이렇게 밝은지 몰랐어."
왠지 마음을 놓이게 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선욱이 미연을 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미연은 이제 달을 보면 가끔씩은 선욱을 생각하게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무심히 달을 쳐다보는 그의 눈이 너무 투명해서 가슴이 저린다.
“국문과 다닌다는 그 사람도 잘 있니?”
방금 생각이 난 사람처럼 선욱은 말했다. 담담했기도 했지만 이미 체념을 담은 말이었다. 미연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신발만 쳐다보았다.
“알고 있었구나.”
“며칠 전에 처음 보는 여자애가 날 찾아왔어. 재형이라는 애와 헤어졌다고 하더군.”
재형에게 연인이 있었던가. 낯선 사실이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몰랐던 모양이네.”
“응. 처음 들어.”
선욱은 전과 다르게 직선적이고,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어딘지 객관적으로 느껴졌다. 미연은 지금 이 상황이 조금 곤혹스럽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많은 것들이 변해버렸다. 선욱은 미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한 번 쳐다보고는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행복한 것 같아 보기 좋아. 잘된 일이야.”
선욱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었다.
“글쎄… 모르겠어.”
미연은 정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선욱은 미연의 눈빛이 이제는 전과 다르게 성숙해져있음을 알았다.
“그래, 그래야지.”
미연이 정정했다. 그녀의 새로운 대답에 선욱은 아무도 모르게 안으로 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정말 헤어지는구나. 잘 지내.”
하지만 선욱은 이 순간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받아들여야했다.
“고마워.”
미연은 선욱의 쓸쓸한 뒷모습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아직도 네 마음이 남아있음을 알아. 하지만. 미연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선욱의 나침반은 이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아주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달빛을 따라 사라지는 남자의 모습에서 미연은 생각했다. 이젠 옛날처럼 달빛이 그녀를 따라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미연은 고개를 숙였다. 달빛이 오래오래 그를 비추었다.
“커피 마시다 엎질렀어. 혼자 마시다 벌 받았지, 뭐.”
방학 며칠 전이었다. 재형은 네 번째 학기였고, 미연은 졸업 이수 학점을 채우기 위해 마지막 전공수업을 듣고 있었다. 재형과 만나기로 한 시간은 그의 구문론 수업이 끝나는 12시였지만 미연이 18세기 불문학을 마치고 복도로 나서자 밖엔 재형이 서 있다. 두 시간 일찍 나타난 재형은 웃고만 있다. 그는 그렇게 늘 불쑥 튀어나왔다. 거리에서 같이 열을 내며 두들기던 두더지 잡기에서처럼, 바닷가에서 보았던 해녀의 모습처럼 재형은 여기인가 하면 저기에서 또 저긴가 하면 여기에서 그렇게 종잡을 수 없는 곳에서 솟아올랐다.
재형의 하얀 난방에 커피가 남긴 갈색의 얼룩이 선명히 들어왔다. 미연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으면 즐거움은 쉽게 흐려지지 않는다.
“정말 이거 어떡하지?”
재형은 계속해서 바보 같은 소릴 했다. 미연은 등교 길에 쇼윈도에서 눈 여겨 봐둔 옷이 떠올랐다. 둘에게 이제 강의 따위는 뒷전이 되고 만다.
“이 옷이야. 잘 어울릴 거야. 어디 한 번 입어 봐.”
미연은 감색의 체크무늬 난방을 들어올렸다. 미연에게 떠밀려 재형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에 들어갔다. 그 사이 미연은 지갑을 꺼낸다. 지갑. 지갑이 아니었다면 재형이 지금 내 옆에 있을 수 있을까. 미연은 돈을 지불하는 동안 점원이 물었다.
“두 분 남매 세요?”
“예? 아니에요. 왜요?”
“닮으셔서요.”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는 재형이 거울 속에서 웃고 있다. 정말 닮았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지만 미연은 점원의 말이 싫지 않았다. 그 만을 닮고 싶었다. 미연은 재형의 몸에 가볍게 기대었다. 두 사람의 몸에선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는 빛이 흐르고 있었다. 세상이 빛나고 있었다.
재형을 기다리는 동안 기억들은 더욱 절실하게 미연을 파고들었다. 어느새 기억의 화살은 부메랑처럼 돌아왔다. 미연의 앞에는 식어버린 커피 잔만 놓여있었다. 커피 때문에 그때 그 일이 떠올랐나. 미연은 커피 잔을 응시했다. 재형과 함께 한 시간들이었다.
“어디 가려고?”
미연의 커다란 짐 가방이 눈에 들어온 재형이 반대편에 앉으며 말했다.
“바람 좀 쐬러.”
“바다?”
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 근데 아까 뭐했어?”
미연은 앞으로의 일을 화제로 삼고 싶지 않았다.
“교수님의 특별 방학숙제. 다음 학기에 대학원 시험이 있으니까.”
재형은 세수를 막 하고 나온 사람처럼 맑은 얼굴을 하고 있다. 나중에 미연이 없어진 걸 알면 재형은 그녀를 찾아 헤맬 것이다. 미연은 재형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미연은 열차를 탈 것이고 발길이 닿는 대로 아무데나 내릴 작정이었다. 그리고는,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교수님께 어떻게 사정해서 나도 따라갈까?”
재형은 미연의 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한다.
“아냐 됐어. 말만으로도 고마워. 그리고 실은…”
“혼자 가고 싶은 거지?”
“그래.”
미연은 생각했다. 조금만 더 일찍 우리가 만났더라면 지금처럼 헤어져야만 할까? 아니 그래도 역시 헤어질 수밖엔 없었을 거야. 이 방법밖에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역까지 재형은 미연을 바래다주었다.
“우리 도망갈까?”
재형이 무슨 눈치라도 챈 걸까.
“무슨 소리야. 도망? 재형아, 넌 지금 4학년인데다 대학원도 졸업하려면 한참 남았고, 게다가 군대도 다녀와야 하고. 그런 식으로 네 인생을 망가뜨리고 싶진 않아.”
재형은 고개를 떨군 채로 말이 없었다. 기차는 떠나려던 참이다.
“열심히 공부해. 딴 생각하지 말고. 알았지?”
미연의 입에서는 자꾸만 엉뚱한 말들이 튀어나왔다.
“내 걱정말고 가서 복잡한 거 다 잊고 와. 좋은 생각들만 가지고 올라와.”
“네. 잘 알겠습니다.”
미연은 마치 선생님을 대하는 학생처럼 공손하게 대답했다.
“잠깐만.”
재형이 불러 세웠다.
“응?”
“조심해서 갔다와.”
미연은 잠시동안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제발, 날 붙잡아. 난 이제 영영 떠나는 거야. 미연은 태연함을 가장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른 봄날의 햇살처럼 가슴 시리게 웃던 그의 모습이 이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아낌없이 사랑하고자 했던 그의 흔적이 저 멀리로 아주 저 멀리로 지워지고 있었다. 한참동안 재형과의 일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재형이 주었던 그 많은 것들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미연은 그의 눈짓 하나 손짓 하나에 의미의 느낌표를 붙여보았다. 그러나 부수적인 것에 대한 그렇듯 정확한 기억들은 본질적인 것을 텅 비게끔 만들어 버릴 따름이었다.
한참이 지나 마음이 진정되자 미연은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어느 가수의 노래를 따라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차창 너머로 멀어져 갔다.
나무가 되겠다던 나의 맹세, 이쯤해서 잊어 줘
우리 다음 세상이 되면 그땐 꼭 지킬게
가진 것 모두 주는 나무되고 팠지만
마지막 인연이었기에 빨랐던 만남
차갑게 말했던 건 가슴속에 타던 울음이었어
잠시 만난 우리 앞에 긴 이별만 남아
어쩌면 다른 사람 맞이할 테지만
그리움이 내 영혼 채우면 다시 만날 거야.
그대여 내 목소리 기억해둬, 너의 눈빛 나는 기억할 테니
우리가 다음 세상에 만나면 첫 눈에 알아볼 수 있게.
첫 눈에 알아볼 수 있게.
나무가 되겠다던 나의 맹세, 이쯤해서 잊어 줘
우리 다음 세상이 되면 그땐 꼭 지킬게*
*김민우, 타버린 나무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