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 나 지금 여행 떠나는 길인데, 배웅 좀 안 해주겠어?”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어디로 떠난다는 거예요? 하여간 지금 나갈게요. 거기 어디죠?” “우리 늘 만나는 곳.” 찰칵. 은미는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 건(建)을 누른 피아니스트처럼 송수화기를 고리에 건 채 한참 동안 꼼짝 않고 서 있었다. - 서영은 “고별곡” 中에서
“나야, 잠깐 볼 수 있어?”
“어디?”
“어딘지 알잖아. 늘 보던 데.”
재형의 긴 말꼬리의 여운은 전화를 끊었다. 순간 미연의 손에서 빛나던 수화기는 어느 사이인가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그 빛은 돌연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미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젖은 눈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미연은 전화를 걸기 전부터 이미 떠날 것을 결심했다. 흔들리지 않겠노라고 그녀는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재형의 목소리는 더욱 다정하기만 했다. 그의 음성이 수화기에 체온으로 남아 자꾸만 미연을 붙잡았다. 하지만 미연은 다시 한번 독하게 마음을 되잡았다. 미연은 미끄러지듯 공중전화를 빠져나왔다.
하지만 눈앞은 자꾸만 흐려졌다. 감당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는 그녀의 내부 깊은 곳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제 안으로 채워지다 못해 밖으로 넘쳐 나오려는 찰나였다. 미연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곳에도 하늘은 그녀의 슬픔을 일말의 동정도 없이 그저 무덤덤하게 내려다볼 따름이었다.
그녀의 내적 고통은 무의미한 일상의 현상에도 가치를 부여하려 했다.
'그래, 재형을 처음 만난 날의 이처럼 터질 것 같은 파란 하늘이었지.'
그렇게 세상 어디에도 재형은 있었다. 고개를 돌려도 재형은 어떤 식으로든 기를 쓰고 나타났다. 번연 그녀의 존제반경내의 한 사람은 끝없는 공명을 일으키자 미연은 결코 자신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르르 떨리는 손을 있는 힘껏 움켜잡았다. 하지만 어느새 기억의 화살은 과거를 향해 당겨지고 있었다.
그날 미연은 정류장에 있었다. 갑자기 시야에 들어온 버스에 미연은 출입문에 올라섰다. 그 순간 미연은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놀란 미연은 허리를 굽혀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쏟아진 것들은 만만치가 않았다. 아, 언제부터 내가 이런 많은 것들을 가지고 다녔던가. 미연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실 버스 안의 승객들의 시선은 잠시였고 무관심에 가까웠지만, 미연은 당혹스러움과 함께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다음 정거장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는 엉겁결에 내려버렸다. 하지만 거리의 사람들도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 같다. 왜 이러지. 떨리는 몸을 미연은 스스로 부둥켜안았다. 그녀의 몸 어느 한 군데가 단단히 부서진 듯한 느낌이었다.
순간.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톡톡 건드는 손길에 흠칫 놀랐다.
뒤를 돌아보니 한 남자가 멀쑥한 표정으로 서 있다.
“버스에서 이거 두고 내리시던데.”
전공서적과 지갑이 그의 손에서 미연에게로 넘겨졌다. 미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에게 속해 있어야 할 물건들의 분실을 채 인식하지도 못했는데, 지금 엉뚱한 한 남자의 손에서 그것들은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아, 예…”
미연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미연의 당혹감이 남자에게도 전염된 듯 그도 어색한 표정을 짓기만 할 따름이었다. 남자의 침묵 속에서 미연은 더욱 당황하고 있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