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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킨트 May 27. 2024

[러브레터] 너를 향한 마음

혜원에게 (3)


    혜원은 만나자마자 첫 잔부터 연거푸 잔을 비웠다. 불안한 모양새였다. 술잔을 내려놓으며 혜원이 말했다. 나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알맞은 말을 제대로 끄집어낼 수는 없었고, 그러한 신중함은 의도와는 다르게 혜원에게는 정반대의 제스처가 되고 말았다.


   “왜 말이 없어? 넌 늘 왜 그렇게 냉정하기만 해?”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시간은 혜원의 빈 잔을 채울 뿐이었다.




   “참 이상해. 손만 뻗으면 얻을 수 있는 행복을 난 그냥 멀리했어. 넌 늘 가까이에 있었지. 너무 가까이에 말이야. 하지만 그래서 보이지 않았어. 항상 뒤에서 날 지켜보고만 있었지. 내가 뒤를 돌아보면 어느 사이엔가 넌 또 내 뒤로 돌아와 자릴 지켰어. 내가 찾으려고 했던 것들은, 그래… 그 구심점에 네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


    한 번쯤은 이런 이야기를 진영에게 듣고 싶었던 게 내 유치한 본심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혜원의 앞에서 나는 언제나 어리석은 자로 남았다. 바보 같은 침묵만이 나의 언어였다. 다시 한번 술잔만이 침묵의 자릴 메웠다.


    “됐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말이야."


   "오늘 왜 그래? 계속?"


   "나 예전부터 매일 한 개씩 수면젤 모았어. 언젠가 그게 필요할 거 같았거든. 지금껏 유리병 안에 모아 두었는데 그게 얼마나 예쁜지 알아? 그리고 어쩌다 한 알 먹으면 잠이 아주 잘 와.”


   술에 취해서 하는 소리에는 누구도 그 진의를 분명하게 알 수 없었다. 혜원은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심각해 보였다. 적어도 요절을 동경하는 철없는 소녀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내 그런 생각조차 지워 버렸다. 세상에 죽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그런 사람은 없다. 다만 자신을 제외한 남들은 온전하다 않다고 생각하는 잘난 사람들의 삐딱한 해석만 있을 뿐이지도 모른다.


   아울러 여자가 남자보다 자살 시도의 빈도가 5배나 높다는 통계와 자살을 하려는 사람은 평소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미리 다른 사람들에게 그 계획을 알린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어찌 되었던 나는 그녀를 위로하고 살아가도록 붙잡아야 했다. 그녀가 다름 아닌 혜원이었으므로. 하지만 스스로에게 향하는 단호한 결심에도 불구하고, 내 입을 떠난 말은 직설법을 피해 갔고 그래서 더 어색하기만 했다.


   “나중에 나한테 그 유리병 보여줘.”


   초라한 나의 말은 본래의 의지와는 다르게 자꾸만 혜원을 구석으로만 몰아세웠다. 나도 알 수 없는 나였다. 혜원은 탁자에 올려놓은 그녀의 두 팔에 엎드리며 말했다.


   “죽고 싶어. 그뿐이야.”

 

   나는 엎드린 그 애의 머리에 살며시 손을 올려놓았다. 혜원아, 너는 그럴 수 없어. 넌 절대로 날 실망시키지 않아.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저 다시 손을 거둘 뿐이었다.


   “거 봐. 넌 아무것도 몰라.”


    혜원은 충혈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그녀의 눈을 응시했지만, 결국에는 점점 희미해지는 서로의 모습이었다.




    숙취해소제가 효과가 있었던지 혜원의 상태는 조금 나아져 보였다. 우리는 밖으로 나와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더 이상 혜원의 쓰라림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를 부축해 주는 것이 전부였다. 정말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걸으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혜원은 계속 비틀거렸다.


    정류장엔 아무도 없었다.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오로지 둘 뿐이었다. 혜원이 말했다.


   “우리 노래 불러. 옛날에 같이 부르던 노래 있잖아.”


    혜원은 조금 큰 목소리로 노랠 부르기 시작했고 나도 따라 불렀다. 오래전 노래였다.


    '너를 향한 마음은 언제나 변함없어,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하여도. 언젠가는 한 번쯤 너를 기억할 거야, 초라한 모습만 남게 되겠지. 한 번쯤 우연히 만날 것도 같은데 닮은 사람 하나 보질 못했어.'


    거기까지 부르다가 노랠 멈추었다.


    “난 이 부분이 제일 좋던데 말이지.”


    "뭐래?"


   “언제라도 내게 돌아오기를...”


   “너 취했어. 똑바로 서 봐”


  하지만 혜원은 여전히 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의시간에 몰래 이어폰으로 이 노래 들었던 기억나? 한쪽씩 나눠 가지고서. 그때가 좋았다. 정말 좋았다.”


   그 목소리는 슬프게만 들렸다.


   “지금이… 지금이 그 때라면 좋겠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


   혜원은 말없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너는 기억 안 나?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갑자기 또렷한 그녀의 목소리였다.


   (4편에서 계속)


내가 제일 슬프다고
모두 앞다투어 외치고 있는
결국 똑같은 사랑 노래
떠나가야 하는 한 사람
남겨진 한 사람
어쩌면 여전히 너는
이 노래를 비웃고 있을까
때늦어 버린 눈물이 필요한 건
한심한 바보들뿐이라고

- 윤상, <결국 흔해 빠진 사랑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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