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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킨트 May 27. 2024

[러브레터] 크리스마스에는

혜원에게 (2)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나는 문을 박차고 전야제로 들뜬 야경의 거리로 뛰어나갔다. 약국을 찾아야했다. 붉은 네온의 약국 간판이 내 시신경을 자극했지만 셔터는 굳게 내려져 있었다. 나는 초조해졌다. 생각보다 혜원이 심하게 취했기 때문이었다.

    크리스마스 데이는 이제 5분 뒤부터지만, 전혀 즐거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혜원의 술기운이 빠지지 않을까해서 나는 그녀를 데리고  근처 낡은 다방에 자리를 잡았다. 다방은 내부 장식이 오래되고 낡은 수족관이 있는, 근처의 복덕방이나 체육관을 상대를 티켓을 끊거나 인스턴트 커피를 파는 전형적인 업소였다. 젊은 사람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지만, 이런 날에 달리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근사한 장소들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이유로 빈자리를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다.

    심하게 취한 혜원은 완전히 축 처진 채였다.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그녀는 가까스로 숨을 뱉어냈다. 나는 다방 마담에게 잠시만 봐 달라고 부탁을 한 뒤에 약국을 찾아 거리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자정까지 문을 연 약국이 있을 리 없었다. 그만 마시게 말렸어야 했는데. 급한대로 편의점에서 숙취 해소제를 사들고 다시 다방으로 뛰어갔다.

 

    병마개를 따면서 나는 혜원을 살펴보았다. 알코올 기운 속에 혜원의 속눈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자정에서 삼십분이 지났다. 네온이 휘황찬란한 도심의 한가운데서는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혜원의 귀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입장에선 걱정스런 시간임에 틀림없었다.  

    혜원의 부모님은 예전에도 그랬듯이 다시 뉴욕으로 떠났고, 혜원은 직장을 이유로 언니와 서울에 남았다. 혜원의 언니가 지금의 사정을 이해 못할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렇게 만취한 채로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혜원의 전화를 받은 건 저녁 6시쯤이었다.

  

    "오늘 같은 날에도 약속 없는 거 뻔히 아니까 얼른 나와."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대학교 근처를 찾아갔다. 혜원과 나는 같은 대학을 다녔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초중고와대학까지 같이 다녔다. 오랜만에 와본 캠퍼스 주변의 많은 것들은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낯선 모습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낯선 건물들 사이엔 낯선 사람들뿐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약속장소인 호프에선 아마도 근방에서 유일하게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인 듯했다. 손때 묻은 탁자와 금방이라도 최루탄에 못 이긴 기침 소리가 터져 나올 것만 같은. 간판도 그대로였다. 이 곳에서는 나같은 넥타이 부대도 외면을 당하지는 않을 것만 같았다. 혜원이 이 곳을 택한 이유를 나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변화에는 익숙지 않았다.


    혜원과 나와 술잔을 부딪히며 외쳤다.


   "우리의 질긴 인연을 위해 건배!"


    그녀는 귀국 직전에 홍콩 지사에서 겪었던 몇 가지 일들을 한동안 계속해서 이야기했지만, 어쩐지 뭔가 잔뜩 할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는 걸 그녀와의 오랜 경험에서 나는 직감했다. 그게 무엇일지 궁금해하고 있는 나에게 그녀는 한 시간이나 다른 이야기로 뜸을 들이더니 불쑥 조금 다른 어조로 말을 뱉어냈다.


    “이상형과 딱 들어맞는 남자는 주위에 있는 게 아니라 어디선가 먼데서 홀연히 나타날 것만 같았어. 아주 우연한 장소에서 만나서 모든 걸 던지는 뜨거운 사랑 말이야. 정말 그런 사람이 나타났었지. 근데 말이야… 이 세상 남잔 믿을 게 못 돼.”


    혜원의 말 속에 한 마디 빠져 있다는 사실쯤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불특정 다수의 남자가 아니라 ‘그 남자’였다. 사실 나는 그러한 파국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녀의ㅜ두 번째 사랑은 외줄타기마냥 불안해 보이기만 했다. 내가 지켜본 그녀의 첫사랑도 그러했고, 두 번째 사랑 역시 무언가 진실하지 못한 구석이 있어 보였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래보였다.


    혜원은 대학에 들어와 첫 학기가 끝날 무렵에 어느 낭만주의 법학도, 진영은 그 때 그 남자를 그렇게 표현했다, 사랑에 빠졌다.  그녀가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노라고 내게 고백하자 나는 실로 감당할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였다. 뒤늦게 나는 혜원을 단순히 어릴 적 추억의 공유자로 여겼던 것이 아니라 한 여자로서, 연인으로서 그녀를 생각하고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진심은 더 이전부터 어렴풋하게나마 인지했는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늦게 두 가지를 알았다. 내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늘 내 곁에 있을 줄만 알았던 혜원이 다른 남자에게 파랑새가 되어 날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난 다음 학기를 포기하다시피 했고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도피처로서 군 입대를 택했다. 돌이켜보면 분명 치졸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바보짓 덕분에 학교에 돌아왔을 때 나는 혜원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녀가 누누이 말했던 그 낭만주의 법학도와의 운명적 사랑에 대해 내가 묻자 혜원은 내 인생에서 그 사람은 없었어, 라고 말했다. 다시는 그 일에 대해 묻지 말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였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사이는 어딘지 모르게 여전히 어정쩡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그 간격을 좁히려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슬며시 다가온 혜원의 졸업식 이후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져갔다.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당신과 만나는 그날을 기억할께요. 헤어져 있을때나 함께 있을때도 나에겐 아무 상관 없어요. 아직도 내 맘은 항상 그대 곁에.  - 김현철,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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