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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킨트 May 25. 2024

친구에게 애인을 뺏긴 여자

슬픔을 내쫓는 방법


1. 슬픔을 내쫓는 방법


아침부터 느닷없이 슬픔은 주체할 수 없는 무게로 그녀에게로 쏟아졌다. 눈물이었다. 그녀의 뺨에서 오래도록 눈물이 흘렀다. 진영은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어 그녀는 진정하려 애를 썼다. 이제 너도 스물다섯이잖아. 언제까지고 네 인생에 이토록 감상적이기만 할 거야? 진영은 자신을 타일렀다. 그제야 멎은 것은 눈물이었다.


그녀는 다시 거울을 살폈다. 웃어본다. 입술을 벌려 웃었다. 푸아, 푸아, 푸아. 거울 앞에서 그렇게 소리를 내면서 진영은 오래 웃었다. 우울함이 그녀를 떠나지 않을 때면 그녀는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의 콘스탕스처럼 그렇게 푸른 악마들을 몰아냈다. 진영은 꽤 오래전에 그녀가 읽었던 소설에서처럼 (여주인공인 콘스탕스가 괴로운 일이 있을 적마다 그랬듯이) 기분전환으로 반신반의하며 거울 앞에서 푸아 푸아, 하고 소리를 내어 웃는 걸 따라 해 보았다. 의외로 결과가 좋았고, 그 뒤로부터 진영은 괴로운 일이 있으면 언제나 거울 앞에서 푸아, 푸아, 하고 입을 벌려 위안의 소리를 내곤 했다.


이번에도 효과가 있었다. 어떤 모습으로도 우울했던 그녀의 얼굴에는 이젠 웃음 뒤의 말끔한 기분이 당당히 방문했다. 미소가 그녀 안으로 번졌다. 평상심을 되찾은 진영은 조그맣게 입속말을 했다. 나는 돌아왔고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이제 출근이 남았다.



2. 오후의 사무실 복도


하지만 회사는 만만치가 않았다. 그녀가 등장할 때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던 이야기들이 갑자기 멈추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 교묘하고 어색한 침묵 속에서 진영의 가슴에는 퍼어런 멍이 커져갔다.


사냥터에서 꿩은 사냥꾼을 발견하면 눈을 질끈 감아 버린다. 사냥꾼이 자신을 보지 못했으리라 믿으며, 또한 처음부터 사냥꾼 같은 것은 없었다고 생각해 버린다. 하지만 슬픈 사실은 언제까지고 영원히 눈을 감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감은 눈은 언젠가는 떠야 하는 법이고 그러면 무시무시한 총부리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 있음을 발견할 뿐,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은 그렇게 꿩처럼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환상쯤으로 드라마쯤으로 왜곡해 버린다.

삼류일 수밖에 없는 삶. 일류나 이류는 우리가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일류적 혹은 이류적 삶이란 현실에서 그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부분만을 인위적으로 도려낸 가공물에 불과하며, 그 가공물은 대개 향신료가 절대적인 감각적 신기루일 뿐이다.


누군가 친구의 애인을 가로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자기 이야기인양 흥분하고 비난하지만 그건 사랑의 확률을 몰라서 하는 소리이다. 사람이 일생동안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생각처럼 많지 않다. 그 수는 비교적 제한적이고, 사람이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경우는 그 접촉이 많아진 경우에 일어날 확률이 높다. 그러니 친구의 애인을 사랑했느니 하는 식의 이야기는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도리를 거스르는데 따르는 비난의 꼬리표는 오히려 두 사람의 사랑에 주는 운명적인 느낌, 혹은 아슬아슬한 스릴감으로 인해 사랑을 그 어느 때보다 정열적으로 타오르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에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그러한 경우의 사랑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매력적인 꼬리표가 어느 순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바뀌며 결국엔 헤어짐의 좋은 구실이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런 삼류 사건은 진영의 인생에서는 처음이었고, 진영은 삶의 타고난 불행한 속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의 삶 역시 다들 그러하다는 사실을 몰랐고, 그저 자신만이 어이없는 상황에 빠졌다고 믿어버렸으며, 세 사람의 관계를 배신으로 규정했으며,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을 경멸하기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통념적인 가치관에 절반 이상 발을 담그고 있는 진영에게는 우정의 배신은 사랑의 등돌림보다 훨씬 감당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진영의 눈에 고인 것은 오늘의 두 번째 눈물이었다.

사소한, 지극히 사소한 눈물.



3. 도망치지 못하다


하지만 세상은 진영에게 마음껏 울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점점 가까워져 오는 사람들의 소리에 진영은 숨을 곳을 찾아야 했다. 화장실이었다.

그런데 이런. 수많은 남자들의 눈동자가 진영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여긴 남자 화장실인데, 누군가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진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허겁지겁 빠져나왔다. 얼마나 뛰었을까. 한참이 지나서야 걸음을 멈췄지만 여전히 기다란 복도는 끝이 없었다. 침착해야 돼. 침착해야 돼. 진영의 의지와는 달리 이제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진영은 그대로 복도 한가운데 주저앉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도 없었지만 진영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아, 아니잖아. 도대체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그건 네가 내게 해야 하는 말인데. 다름 아닌 네가 머릴 숙여 내게 사과해야 하는데. 하지만 혓바늘 같은 말은 진영의 입 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4. 사랑의 종언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화장실을 빠져나온 진영은 로비의 커다란 유리창에서 밖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흐렸다. 진영은 숨을 고르며 지상의 거리로 시선을 옮겼다. 아래쪽의 세상은 횡단보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두껍고 커다란 유리 너머로 진영은 사람들이 길을 건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쓸쓸한 흑백 무성영화 같아, 진영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제 흑백영화 속의 신호등은 빨간색으로 컬러링 되고, 차가 잘 다니지 않는 거리는 몇 명의 사람들이 길을 건넌 뒤로는 텅 비어있다. 그 순간 진영은 결국 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감정적인 비련의 주인공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깨달았다. 텅 빈 거리처럼 그녀가 사랑에 빠져있던 그날들이 끝났음을. 잘 가라, 부디 안녕히. 진영은 이제 일어나 창밖을 향해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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