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눈물 나도록 그리운 사람
“눈물 나도록 그리운 사람?”
“내게 그 사람은 당신이었죠.”
이번엔 내가 할 말을 잃었다. 조금 더 일찍 말하지 그랬어. 나도 가끔씩은 당신이 못 견디게 그리웠어. 하지만 나는 그 말들을 할 수가 없었다. 지원과 나는 과거의 연인이었고, 지금은 각자의 곁에 이전과는 다른 서로의 연인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빗나간 인연은 오래된 사막처럼 쓸쓸할 따름이다.
침묵의 시간은 택시의 미터기가 천 원이 더 오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지원도 지쳤는지 이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어쨌든 사흘만 잘 보관해 주세요.”
그날 이후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게 이틀이 지나갔다. 사흘째 밤, 잠들기 전 갑자기 나는 그 만 원짜리 지폐가 몹시 궁금해졌다. 혹시 무슨 흔적이라도 있을지 몰라. 그녀가 말한 ‘증거’라는 단어에서 나는 지원이 무슨 기록을 남겼을 거란 추측을 했다.
하지만 지원의 지폐는 아무리 봐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적당히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어느 누구의 지갑에서든지 찾을 수 있는 지폐였다. 전화번호나 메모, 혹은 낙서 따위는 적혀있지 않았다. 정말로 흔한 지폐였다. 다른 만 원권과 일련번호를 제외하고는 서로를 꼭 빼다 닮은 클론이었다.
물론 그 하나만 뗴어놓고서 보면 - 설혹 비슷한 쌍둥이가 많다고 해도 - 그것은 이 세상에 유일한 하나의 사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지폐는 지폐였다. 딱히 시선을 끌만한 건 없었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또렷한 은색 실선은 위조지폐가 아님을 증명하였고, 더군다나 시각 장애인을 위한 오돌토돌한 세 개의 동그라미도 분명히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형광등에 비춰보면 숨어있는 세종대왕을 알현(謁見)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기운에 오른손에 쥔 만원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자가 없었다. 그 지폐의 아래엔 그림자가 없었다. 혹시 뭔가 잘못 봤나 싶어 책상 위의 백열등을 켜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돼, 이런 일이. 원래 지폐란 그런 특성이 있나 하는 백치 같은 생각으로 나는 다른 것들을 시험해 보았지만 그들은 그들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그림자를 틀림없이 지니고 있었다.
나는 당장에 지원에게 전화를 걸어 묻고 싶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왠지 꺼림칙한 기분에 나는 그 지폐를 영어사전 사이에 끼워두고는 잠자리로 돌아왔다. 밤이라 그런 지 몰라.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눈을 뜨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게 제대로 돌아와 있을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떴을 때 상황은 더욱 안 좋아져 있었다.
온데간데없이 지원이 맡긴 지폐는 사라져 버린 채였다. 어젯밤의 일이 꿈이었을 거란 생각으로 사전을 폈을 때 그 안엔 오로지 검은 글씨로 된 단어와 발음기호들 뿐이었고, 돈은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 그 사이에 내가 나도 모르게 무슨 몽유병이라도 걸려 돈을 다른 어디에 두었을지도 몰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하루종일 집안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허사였다.
다음 날 나는 하는 수 없이 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보다 연락이 늦었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뭔가 알고 있다는 투였다. 수많은 변명을 준비해 두었지만 나는 그녀의 어조에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미안해. 잃어버렸어. 하지만 분명히 그동안 단단히 잘 보관하고 있었어.”
“걱정 말아요. 그런 사실이라면 알고 있어요.”
"무슨 말이지 그게?"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