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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킨트 May 24. 2024

[짧은 소설] 그녀의 연인에게


    주저하던 끝에 지현은 진동하고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지난 며칠 동안 지현은 하염없이 전화기의 액정화면만 쳐다보았다. 기다리던 그 사람의 전화였는데, 막상 발신자 번호에 찍힌 이름을 보니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피하고만 싶어진 마음은 차라리 전화기를 불구덩이에라도 던져버리고 싶었다.


    받고 싶지 않아, 절대로.


    하지만 지현은 선택할 수 없었다. 손아귀의 힘마저 빠져버렸는지, 가까스로 휴대폰을 잡고 있는 마음 하나까지도 떨렸다. 밖은 차가운 겨울이었고, 지현의 방에 걸린 거울에는 초라하게 떨고 있는 손과 입술만이 보였다. 계절은 암울한 결말을 예고했고, 불온한 미래는 금방이라도 초인종을 누를 기세였다. 처음부터, 어차피, 정해져 있는 일.

    지현은 말없이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딱 그 노래의 가사였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해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




    “언니.. 저예요, 은미. 나 지금 심장이 빨리 뛰는 거 같아요. 언니를 처음 보던 날만큼은 아니지만, 그래요... 그때도 그랬어요. 있잖아요, 나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거 같아요. 아니 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요. 언니, 나 용서해 줘요. 언니. 미안해... 정말 미안해, 우리 너무 힘들었잖아. 나 이제 정말 그만두고 싶어.... 아니야, 그런 이유가 아니야. 나 지금은 그 사람을 사랑해. 미안해, 언니.”


    은미는 그렇게 말하면서 잠시 울었다. 사실은, 잠시가 아니라, 꽤 오래 서럽게 울었던 것도 같다. 비록 지현의 시간 속에는 은미의 울음이, 그 눈물의 시간이 너무나 가식적인 짧은 제스처였다고 느꼈을지라도.

 

    지현은 언젠가 은미가 그녀의 품 안에서 수줍은 알몸을 감추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랑한다는 말. 사랑, 그러나 기어코 사라지고야 마는 말, 증발해버리고 마는 성질의 것, 결국에는 아무것도 아닌. 모호하거나, 지나치게 초라하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우울함과 동시에 기어이 모자란 사람들의 변명 같은 말. 사랑의 대가가 불지옥이라도 너와 함께 뛰어들겠다던 그 위대한 감정의 결말은 그렇게 초라했다.



 

    이대로 울어야 한다면, 앞으로 영영 그래야만 한다면 차라리 숨을 끊고 싶어. 하지만 눈물도 결국에 마르는 법. 지현은 겨울을 내내 울었고, 봄을 지나 여름이 오자 그녀의 몸속엔 수분은 다 타버리고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여름의 한가운데, 무더위 속에 길을 걷고 있던 두 사람은 만난다. 길의 이쪽으로 지현이 걸어가고 있을 때에, 길의 저쪽에서 은미가 걸어온다. 운명이란, 우연이란 어쩌면 너무나도 잔인한 무엇.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잘 지냈어?”

  

    “... 아뇨, 별로, 안 좋아요.”

  

    가늘고 연약한 목소리의 대답. 한참인가 그렇게 두 사람은 길의 한가운데 서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 말들과 함께.

 

    “잠깐 같이 걸을래요?”


     길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렇게 두 사람은 묵묵히 침묵을 걷는다. 결국에 길의 가장자리에서 지현은 묻고야 만다.

 

     “그 사람은...?”

 

    “... 몰랐군요. 그 사람 입원해 있어요. 살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람, 지금 너무 아파요.”


    지현은 그 말에 다리의 힘이 풀려버려 서있기도 어려울 지경이었지만, 속내를 감추고 또 물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어디로 가고 있는 거니?


    “편의점에요. 분무기가 필요해서요. 체온을 내릴 때 필요해서요.”




    은미가 편의점 카운터에 분무기를 올려놓자, 지현은 재빨리 지갑에서 돈을 꺼내 지불했다. 은미가 잠시 멍하니 지현을 바라보았지만, 두 사람 말이 없었다. 지현은 일부러도 눈을 피하고, 입을 닫았다.


    침묵은 병원의 정문까지 이어졌다. 멈춰 선 은미의 눈가는 어느새 젖어있었다. 하지만 둘은, 일부러, 그것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기서 헤어져야겠네요. 이제 들어가 볼게요. 아, 그리고 이거 고마워요.”


    은미는 분무기를 들어 보였다. 그리고 조금 웃었다. 병원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지현은 한참이고 바라보다가 뒤돌아 걸었다.



   

    그때에 지현이 느낀 감정은, 고통은 아니었다.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보다는 좀 더 훨씬 넓고, 큰 감동 같은 것이었다. 뜻밖에 보고 놀란 불행에 비교한다면, 그 사람의 슬픔 따위는 작고 우스운 것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운명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였다. 누구이건 운명이란 그 어떤 특별한 것도, 잔인한 예외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행복하다고 생각하던 사람들마저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


    지현은 작은 벤치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려다 말고 지현은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여러 차례 눌렀다. 그날 무더운 여름의 하늘은 지나치게 파랬다. 하늘을 배경으로 천천히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지현은 그렇게 은미와의 마지막으로 그녀의 전화번호를 지웠다. 은미의 행운을 빌면서, 지현은 그녀가 사랑했던 한 여자와 그리고 지금 은미 곁에 있는 그녀의 연인처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소원을 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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