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물원킨트 May 27. 2024

[러브레터] Come together

혜원에게 (5)


    오후 다섯 시쯤이었다. 현관문을 여니 집배원이 큼직한 소포를 하나 든 채로 서 있다. 문득 소포에 적힌 글씨가 무척 낯익음을 깨달았다. 아차. 발신인은 분명 혜원이었다.

조심스럽게 소포를 뜯어보니 유리병이었다. 유리병 속에 알록달록한 수많은 수면제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게도 보여줘, 난 그렇게 말했던가.


    그런데 아직 무언가 남아있었다. 박스 안에는 또 하나의 포장물이 숨은 채였다. 박스 속에 박스. 사진 속의 또 다른 사진, 반복의 기묘함. 저 깊은 곳에서 나를 잡아 다니는 그 무엇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너무나 작은 크기의 그것. 포장을 풀어낸 그것은 테이프이었다. 투명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갇힌 테이프가 주홍글씨로 품은 단어는 다름 아닌 ‘BEATLES’였다.


    오래전 내가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바로 그 해적판 비틀즈 테이프는 어느 틈엔가 내가 아닌, 혜원의 수중에서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랬구나. 나보다 훨씬 오랫동안 진영은 오래 전의 12월을, 촌스러운 금박의 추억을 간직하고,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오랜만에 다시 만난 테이프가 오디오에 들어가 스윽스윽, 하는 오래 전의 잡음을 들려주는 순간에 폰의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야.”


    한때는 수신인을 알 수 없는 전화기를 쓰던 시절에 서로를 시험해 보기 위한 수단이자 암호였던, 습관 같은 혜원의 인사말이 이제는 전과 다르게 주저함과 미안함의 언어로 들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랬다.

어색한 인사말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고르지 못하는 내게 혜원은 말을 이었다.


   “여전히 광합성 중인가? 햇살을 먹으면 누구나 행복해지는 걸까?”


    스무 살 즈음에 운동장에 서있던 두 사람, 그리고 이제 각자의 수화기를 든 두 사람. 그 간격만큼이나 긴 침묵이 나를 삼켰다. 나오지 않는 나의 말들.




    “밖을 봐.”


    그제야 그녀가 근처에 있음을 알아차린 나는 베란다로 나갔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혜원이 서 있었다. 전화기 속으로 그녀의 작은 숨소리가 내게로 새어 나왔다.


    “날 사랑해?”


    나는 혜원을 바라보았다.


    “아니라는 거짓말은 하지 마. 넌 거짓말이 서툴러서 내가 다 알 수 있으니까."


    “널 사랑해.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날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말은 그랬다.


    갑자기 나는 온몸에 감싸고도는 전율을 느꼈다. 어쩌면. 어쩌면 정말로 해피엔드는 가능할 지도 몰라. 나는 서둘러 현관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어마어마한 혜원의 자력이 나를 끌어내고 있었다. 뛰쳐나가는 내 뒷모양새에 스피커는 비틀즈의 ‘Come Together’를 크게 부르기 시작했다.


   I RUN To Get Her.


    - 끝 -

이전 12화 [러브레터] 아름다운 거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