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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물원킨트 May 27. 2024

[러브레터] 아름다운 거리

혜원에게 (4)


    봄날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따스한. 두 팔을 벌린 채로 운동장에 선 내가 보인다. 눈을 감은 채로 빛의 온기를 마음껏 누리던, 젊은 날의 내가 있었다.


    “뭐 해?”


   혜원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광합성을 하고 있어.”


   혜원은 나의 말에 웃었다. 스무 살, 생기 있고 수줍은 웃음이었다. 나는 비로소 용기를 내어 덧붙였다.


   "널 생각하면서 말이야.”


   혜원은 나의 말에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오랫동안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아, 그때. 이젠 추억으로 퇴화되어 버린 일,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마는 일. 하지만 안타까워도 웃을 수 있는. 오래전의 일들은 막차 안에서도 문득문득 떠올랐다. 혜원은 점점 술이 오르는지 내 어깨에 기대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버스는 가끔씩 덜컹거렸다.


   혜원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새벽 어디쯤에 그녀를 문 앞에 바래다주었을 때 혜원은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말고 말했다. 배웅을 마친 남자와 이제 그를 전송하려는 여자는 술기운을 거둔 채 잠시 멈칫했다.


   “우리 사이는…”


   혜원의 말엔 아직도 알코올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래, 알아. 아름다운 거리. 네가 늘 말했잖아, 아름다운 거리라고.”


   지난여름에 나는 혜원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홍콩이 지겹다며 진영은 나를 또 다른 비행기에 태웠고, 우리는 서안(西安 Xian)에서의 일주일간 관광을 함께 했다. 우리는 대안탑을 배경으로 셔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고, 화로에 향을 올려 소원을 빌었다. 소향(燒香)의 순간에 두 사람의 각자의 소원은 과연 무엇이었지 불현듯 나는 궁금해했다. 등을 맞대고 비틀즈의 노래를 불렀던 두 사람은 진시황릉이 남긴 지하의 메시지와 3개의 용갱의 수수께끼에 넋을 놓기도 했다. 연속되는 슬라이드처럼 나는 그곳에서의 일들이 떠올랐다. 널 위해 반년의 저축을 털어 바다를 건너 널 보러 갔지. 생소한 도시, 낯익은 거리. 서로를 위로해 가며 한숨도 쉬었지.*


   홍콩을 떠나기 전날에 혜원이 내게 말했다. 언젠가 우리가 함께 보았던 연극 기억나요? ‘아름다운 거리(距離)’말이야. 난 그런 적당한 거리에서, 그래, 지금 정도면 아름다울 거야. 언젠가 네가 나에게 털어놓은 그 감정이란 거 아마 바람 같은 거라고 생각해. 시간이 지나면 그랬던 적도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거야. 난 우리가 서로를 아름다운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너처럼 좋은 사람을 사랑이란 감정 때문에 놓치고 싶지 않아. 진영은 그렇게 말했다.

    아름다운 거리, 나는 좀 더 그 거리를 좁히고 싶었지만 진영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고 나는 예정보다 빠른 귀국을 택했다. 마침내 진영은 공항에서 눈물을 흘렸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면 영영 다시는 못 만날 것만 같아. 진영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울음을 참지 못했다. 나는 흐느낌에 떨고 있는 진영을 안아주려다 말았다. 그것이 그녀가 말한 아름다운 거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서울행 비행기 안에서 멀어져 가는 홍콩을 바라보며 유리창에 희미하게 비친 나에게 말했다.

   굿바이. 마이 블루 홍콩 차이나,라고.


    그런데 지금.


   “아름다운 거리잖아.”


   나의 말에 혜원은 정색을 하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그런 말은 잊어.”


   혜원은 일부러 문을 소리 내어 쾅 닫았다. 그녀를 들여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나는 알았다.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혜원이 내 마음속에 깊은 곳에 살아있음을. 이젠 다 잊었다고,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진실은 의지와는 반대 방향에 서 있었다. 홍콩에서 돌아온 혜원의 얼굴을 보는 그 순간부터, 내 가슴의 설렘은 다시 살아나고 말았다.


   (5편에서 계속)


   *와와 ‘飄洋過海來看你'에서 부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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